• 동향면 진성로 1697[능금리 2202]에 소재하며, 대성전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디 용담향교는 용담면 옥거리 358번지 용담면 소재지 북쪽 용강산 남쪽 기슭의 비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용담현지에 의하면 고려 공양왕조(恭讓王朝, 1389~1392) 때 현령 최자비(崔自卑)가 중건(重建)하였다고 하는데, 창건에 관한 기록은 없다. 이후 정유재란(丁酉再亂, 선조 30, 1597) 때 병화(兵火)에 타버려 현령 박지술(朴知述)이 옛터의 동쪽에 이건(移建)하였으며, 인조 11년(1633) 현령 오전(吳腆)이 중건하였고, 현종(顯宗) 5년(1664)에 현령 홍석(洪錫)이 그 동쪽에 이건하였다. 이후 퇴락되었는데, 1761년 현령 김한길(金漢吉)에 의해 중수되었으나 그 이후의 중수내력은 기록의 멸실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용담향교에 보관된 현판에는 1918년에 중수하였다는 임병도의 기록이 있고, 1930년 군수 주시헌이 기록한 중수기, 1964년 향교 중수 방명록, 1970년 중수기 등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시로 보수 내지는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용담댐 수몰로 인하여 지금의 자리로 1998년 12월 25일 이건되었다. 내삼문에서 돌계단을 내려오면 마당 건너 맞은 편에 명륜당이 있으며, 그 앞 좌우에 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시습재, 서쪽에 양사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명륜당은 자연석 주초에 도리기둥, 맞배지붕의 건물로 전면 4칸 측면 1칸이다. 측면은 보수하면서 기둥을 덧대어 외형으로는 2칸으로 되어 있다. 동재(東齋)인 시습재(時習齋)는 4각 기둥에 맞배지붕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정면 우측 2칸 측면(뒤에서) 1칸 반 부분에 2개의 방을 내고 나머지는 마루로 되어 있다. 시습재라는 편액은 동춘 송준길의 글씨이다. 서재(西齋)인 양사재(養士齋)는 외견상 시습재의 반대 꼴인데 자연석 주초에 도리기둥과 맞배지붕, 그리고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전면 좌측 2칸, 전퇴 형식으로 나눈 측면의 뒷 부분에 2개의 방을 내고 나머지는 마루로 되어 있다. 양사재는 1831년(순조31) 창설되었고, 1839년(헌종5 1839) 재사(齋舍)가 태고정(太古亭) 아래 세워졌으며, 1871년(고종8) 향교 남쪽으로 이건(移建)되었다. 1852년(철종3) 사마재계가 창설되었으며, 1860년(철종11) 향교 남쪽에 재를 지어 연, 계방(蓮桂榜) 및 계원록(契員錄)을 재에 보관해 두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다. 향교 앞 오른쪽에 있는 비각 안에 2기의 비석이 있는데, 1기는 ‘위성건공고학생순계춘백세기념비(衛聖建功高學生詢啓春百世紀念碑[龍潭鄕校])’이고, 오른쪽의 다른 1기는 ‘위성건공구학생순백세기비(衛聖建功具學生詢百世紀碑[後三百三十二年 龍潭鄕校])’이다. 명륜당 동쪽 모퉁이 뒤쪽, 앞 담장에 있는 외삼문은 4각 기둥 3칸의 솟을대문이다.《참고문헌》龍潭鄕校誌(용담향교·진안문화원, 2011)
    용담향교 대성전(龍潭鄕校大成殿) : 용담면에 있던 고려시대의 향교 대성전. 1391년에 용담현령 최자비(崔自俾)의 발의로 창건되었다. 공자·안회(顔回)·증삼(曾參)·자사(子思)·맹자(孟子) 등 5성(五聖)과,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 등 송대(宋代)의 4현(四賢),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안유(安裕)·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조헌(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박세채(朴世采) 등 우리나라 18현(十八賢) 등 모두 27위를 배향하고 있다. 향사일인 석전제(釋奠祭)는 2월과 8월의 초 정일(丁日)에 지낸다. 1984년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으며 최근에 이건된 관계로 건물의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참고문헌》龍潭鄕校誌(용담향교·진안문화원, 2011)
    용담향교 비각(龍潭鄕校碑閣) : 동향면 진성로 1697(능금리 2203), 용담향교 외삼문 앞 동쪽에 있는 비각. 안에 1928년에 세워진 2기의 비석이 있는데, 좌로부터 ‘위성건공고학생순계춘백세기념비(衛聖建功高學生詢啓春百世紀念碑)’와 ‘위성건공구학생순백세기비(衛聖建功具學生詢百世紀碑)’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용담향교가 불에 타게 되자 고계춘(高啓春), 구순(具詢) 두 사람이 공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5성위판을 수습하여 주천면 운봉리 구봉산 바위 굴속에 간직하여 난리가 끝나자 무사히 되찾아 온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2016. 12. 28. 진안군문화유산 유형 제 2호로 지정되었다.《참고문헌》龍潭鄕校誌(용담향교·진안문화원, 2011)
  • 진안읍 향교길 13-6[군상리 527-1]에 있는 향교. 1414년(태종 14)에 지금의 진안읍 상조곡(上鳥谷)[웃새골]에 처음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1년(선조 34)에 중건되었다. 1636년(인조 14)에 이건하였는데 “향교가 관아와 인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불편했기 때문”이라 하기도 하고, “향교를 중건한 뒤 춘추향제(春秋享祭)가 끝나면 이상하게 그날 밤 호랑이가 교복(校僕, 향교의 하인)을 물어갔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타난다. 1633년 11월 16일조에 전라감사의 치계에 의하면 “진안 고을의 향교가 관아와 멀고 관리하는 하인의 수가 적어 제대로 수호하지 못하고 있는데다 지대가 낮고 습하여 건물이 썩고 있으니 좀 더 인가에 가까우면서 넓고 트인 곳으로 옮겨 세우도록 허락하여 달라”는 기록이 있다. 향교를 이건하기로 결정하고 1636년에 향리의 유림들이 헌금을 모아 논 3,000평을 마련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1921년과 1969년에 중수하였다. 명륜당(明倫堂)의 구체적인 건립 시기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31년 11월 1일 군수 주시헌의 ‘명륜당 중수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중수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명륜당은 본디 지방의 관립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한때 현 진안초등학교의 전신인 ‘진안 사립 문명학교’(←)의 학당으로 사용된 바 있다.【형태】일반적으로 향교의 배치는 배향공간과 강학공간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지고, 이 밖에 일부 변형된 방법도 쓰이고 있다. 향교가 자리 잡은 대지가 평지인 경우는 전면에 배향공간이 오고 후면에 강학공간이 가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룬다. 반면 대지가 구릉을 낀 경사진 터이면 높은 뒤쪽에 배향공간을 두고 전면 낮은 터에 강학공간을 두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룬다. 진안향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취하고 있다. 앞쪽에 학교의 역할을 하는 명륜당이 있고 중간에 동재와 서재가, 뒤쪽에 내삼문을 거쳐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배치되었다. 전체 공간은 명륜당·동재·서재로 이루어진 교육공간과 대성전을 둘러싼 담장으로 이루어진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지며 동쪽에는 별채로 향안당이 있다.【대성전】⇒진안향교 대성전.【명륜당(明倫堂)】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구체적인 건립시기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31년 11월 1일 군수 주시헌(朱時憲)의 명륜당 중수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중수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명륜당은 본디 지방의 관립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한 때는 현 진안초등학교 전신인 사립 진안문명학교의 학당으로 사용된 바 있다.【동재(東齋)·서재(西齋)】동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향안당(鄕案堂, 사마재)】향안을 보관하던 곳인데, 사마재와 같은 건물에 있다. 사마재는 1757년(영조 33) 김중구(金重龜)가 성균관에 오른 뒤에 낙향하여 사재를 털어 이곳에 재(齋)를 짓고 연방안(蓮榜案,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명부)을 보관하였다. 진안현의 향안은 관아의 남쪽 가까이 향사당에 갈무리되어 있었으나, 향사당이 퇴락하여 보관할 처소가 없게 되자 1860년(철종11) 향교 경내의 사마재로 옮기게 되었고, 그 뒤 47년이 되는 1907년(순종 1) 사마재가 무너지자, 영계원(靈溪院. →영계서원)의 강사(講舍)로 옮기게 되었는데, 집강(執綱) 이근조(李根兆)와 장의(掌議) 전영창(全永昌)이 주관하였다. 그러다가 향안당을 창설하자는 논의와 사마재를 중건하자는 논의가 일어 1927년 가을에 고을의 연조(捐助)와 향교 재산의 보조를 얻어 착공, 사마재의 옛터에 집을 짓고 동쪽 방은 향안당이라 이름하고, 서쪽 방은 사마재라 하여 1928년 늦은 봄에 완공하였고, 1942년 중수하였다. 향안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제를 지낸다.《참고문헌》鎭安鄕校誌(진안문화원, 진안향교, 2009)
    진안향교 대성전(鎭安鄕校大成殿) : 진안읍 군상리 527-1번지에 있는 향교의 주 건물. 1984년 4월 1일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대성전은 내삼문 안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전면 1칸을 개방한 전퇴·개방형 구조이다. 3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화강암의 자연석 덤벙 주초를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다음 창방과 결구하고 있다. 기둥 상부는 일출목 이익공 양식으로 창방과 장혀 사이에는 화반을 끼워 장식하였다.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이고 측면은 풍판으로 장식되어 있다. 1632년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기단과 내부 마루를 보수한 것을 빼고는 본디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간단한 구조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크며 구조물의 조각 장식이 거의 없어 매우 단조로운 편이다. 대성전 안에는 1734(영조 10)년에 제작된 공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회(顔回)·증삼(曾參)·자사(子思)·맹자(孟子) 등 오성(五聖),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 등 송대(宋代)의 사현(四賢),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유(安裕),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 등 우리나라 18현(十八賢) 등 모두 27위를 배향하고 있다.《참고문헌》鎭安鄕校誌(진안문화원, 진안향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