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읍 가림리 1140번지 은천마을 숲 안에 있는 줄사철나무. 노박덩굴과에 속하는 상록 관목이다. 1998년 1월 9일 전라북도 지방 기념물 95호로 지정되었다. 은천마을에서 관리한다. 팽나무를 지주목으로 하여 붙어서 기어오르고 있기때문에 수고(樹高)가 비교적 크고 수령이 200년쯤 되는 오래된 나무이지만 왕성한 수세(樹勢)를 자랑한다. 나무는 모두 3그루가 있는데, 1번 나무의 흉고(胸高) 둘레는 44㎝, 수관 크기 470×560㎝, 높이 460㎝이다. 2번 나무는 둘레 36㎝, 수관 크기 500×350㎝, 높이 510㎝이고, 3번 나무는 둘레 26㎝, 수관 크기 310×310㎝, 높이 500㎝이다. 기저부의 수간 굵기는 국내에서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 만큼 굵다. 일제강점기 때 기념물로 지정된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이 부근에 서 있다.《참고문헌》문화재청(http://www.heritage.go.kr/heri/idx/index.do)
  • 마령면 마이산남로 367[동촌리 8]에 소재하는 자연석 탑. 마이산 탑사 주변에 쌓여 있는 돌탑들로 1976. 4. 2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원추형탑 5기에 외줄탑 등 모두 80여 기에 이르는데, 작은 바윗돌을 쌓아 만든 모습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탑들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여,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뾰족하게 쌓아올린 모습으로, 비록 막돌이긴 하나 설계가 정확하고 틈새가 없이 치밀하게 쌓여 우람한 체구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다. 이곳의 원추형 탑은 천지탑(天地塔), 오방탑(五方塔), 월광탑(月光塔), 일광탑(日光塔), 약사탑(藥師塔) 등으로 이름이 붙어있는데, 이밖에도 외줄탑이 지형에 따라 잘 배치되어 쌓여있어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가운데 천지탑은 규모가 가장 우람하고 조형이 아름다워 이 구역의 돌탑 중 으뜸이라 할만하다. 천지탑은 골짜기의 가장 높은 곳에 조성되어 아래의 모든 탑들을 호령하듯이 서 있다.【천지탑의 형태와 기법】천지탑의 왼쪽 앞에는 네모진 석단(石壇)을 쌓은 다음 그 위에 외줄탑으로 동서남북 방향과 가운데 하나 즉,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오방탑 다섯 기를 세우고, 마주하여 천지탑을 조성하였는데, 11시 방향의 남북으로 나란히 서있다. 골짜기 아래쪽에서 볼 때 오른쪽이 남탑이고, 왼쪽이 북탑이다. 탑은 따로 쌓여진 것이 아니라 두 탑은 밑변의 지름이 14m에 이르는 하단부에서는 하나의 몸체로 쌓였다가 위로 올라가면서 높이 6.6m 지점에서 나뉘어 두 탑을 이루고 있다. 북탑의 높이는 13m, 남탑은 13.5m로 남탑이 약간 더 높게 조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마치 부부와도 같은 두 탑 가운데 남탑은 북탑에 비해 키는 크지만 다소 훌쭉해진 가냘픈 몸매로 상단부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곡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몸체 정상 부분에 이르면 직경이 43㎝정도밖에 되지 않는 원뿔형태를 이루어 그 위에 얹혀 있는 넓은 상륜부(上輪部)를 지탱하기에 힘겨워 보인다. 198㎝ 높이의 상륜(上輪)은 몸체의 돌과는 달리 각이 지게 다듬은 14매의 판석(板石)을 포개 올린 다음 꼭대기에 보주(寶珠) 모양의 타원형 돌을 얹어 마감하였으며, 각 판석 사이에는 작은 돌들을 끼워 넣어 흔들림이 없도록 처리되어 있다. 거의 같은 형식이지만 북탑은 원추형의 곡선이 다소 어긋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한번 무너져 내린 것을 후대에 다시 쌓아 올리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 북탑 역시 몸체 정상 부분은 직경이 43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원추형으로 처리한 뒤, 194cm 높이의 상륜을 구비하고 있는데 남탑의 상륜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각진 판석을 포개어 올리고 맨 꼭대기에는 보주 모양의 타원형 돌을 얹었으며, 각 판석 사이에는 작은 돌들을 끼워 넣어 상륜을 고정시키고 있다. 다만 북탑의 상륜이 남탑의 상륜에 비해 판석이 12매로 줄어 키가 낮게 조성되어있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탑의 재료는 근방에 산재하는 자연석이다. 하단부에서 8m 정도 높이에 이르기까지에는 60~80㎝ 가량의 모나지 않은 큰 돌을 이용하여 차곡차곡 쌓았으며, 큰 돌 틈새에는 작은 돌들을 끼워 넣음으로써 서로가 잘 엇물려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다듬지 않은 돌을 차곡차곡 쌓는 방법을 ‘막돌허튼층쌓기’라고 하며, 이 기법이 옛 성곽이나 돌담 그리고 서낭당 돌무덤, 누석대나 방사탑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탑의 조성 목적과 연대】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탑을 쌓았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다. 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탑의 축조목적과 양식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순서이겠다.【불탑(佛塔)일 가능성】마이산의 석탑(石塔)과 같은 유형을 지금은 자주 볼 수 있지만 예전으로 거슬러 가면 유례가 드물다. 먼저 일반적인 ‘탑’과 ‘적석’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탑(塔)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 ‘탑파(塔婆)’의 준말이다. 본디의 탑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탑은 일사(一寺) 일탑(一塔)이 상례였다. 그리고 형태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탑은 대부분을 석탑이 차지하였는데, 적석을 불탑(佛塔)으로 조성한 사례로는 철원의 심원사 석대암(石臺庵)을 드는 정도이다. 그렇다고 하여 마이산 적석이 불탑의 기능을 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불탑은 사찰 경내에 있어야 하는데, 마이산 적석은 예전에는 사찰 경내가 아닌 곳에 조성되었다. 지금은 마이산(馬耳山) 탑사(塔寺)가 들어서 있지만 그것은 근래의 일이다. 그러므로 적석이 불탑의 기능을 했을 가능성은 배제된다고 하겠다.【서낭신앙의 가능성】다른 가능성의 하나로 서낭당 또는 서낭신앙이 거론된다. 서낭당이란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을 모셔놓은 신당, 즉 ‘성황당(城隍堂)’이라고도 한다.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 형태로, 그 곁에는 보통 신목(神木)으로 신성시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기도 한다.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신 신역(神域)으로 신앙의 장소이다. 이곳을 내왕하는 사람들은 돌·나무·오색 천 등 무엇이든지 놓고 지나다녔다. 물론 그곳의 물건을 함부로 파거나 헐지 않는 금기가 지켜짐은 말할 나위가 없다. 오보(oboo)도 가능성의 하나로 거론된다. 오보와 비슷한 것들은 시베리아, 중국 동북지역, 티베트, 신장 위그르 자치구 등지에 분포하는데, 한국의 서낭당도 이와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본구조는 돌무더기나 흙더미로 만든 기단(基壇) 위에 목간(木杆, 나무장대)과 자연수목으로 꾸며서 만드는데, 그 규모와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몽골과 티베트의 오보는 돌을 보기 좋게 쌓은 원단(圓壇) 위에 목간과 기 또는 칼과 창 등의 무기를 세워 두는 것으로 규모가 크며, 오보군(群)을 형성하고 있는 곳도 있다. 한국 등지의 오보는, 아무렇게나 쌓인 돌무더기 위에 목간을 세우거나 자연수(自然樹) 밑에 돌을 쌓아 만드는 정도로 무리를 형성한 예는 거의 없다. 현재 적석이 있는 자리는 그런 축조물이 들어설 자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마이산의 분수령 등성이인 세칭 천왕문으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면, 그곳에 서낭당은 얼마든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서낭당 돌무더기의 흔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해오는 이야기도 없으니 그 가능성은 일단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고갯마루에서 남쪽으로 약 300m쯤 남쪽으로 내려온 곳에 예의 적석들이 있어 고갯마루도 아니고 마을 어귀도 아닌 곳에 있는 것이 되므로, 상례로 보아 서낭신앙과는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다.【비보탑일 가능성】다른 가능성이 없다고 보면 이 탑의 축조목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비보(裨補)의 목적으로 쌓은 적석일 것이라는 의견이 대두된다. 마이산에 관하여 풍수지리적으로 서술한 옛 기록은 이중환(李重煥)이 쓴 『택리지(擇里志)』와 이익(李瀷)이 쓴『성호사설(星湖僿說)』등이 있다. 『택리지』에서는 ‘계룡산이 전라도 마이산 맥의 끝이다’ 라고 적고 있어, 마이산과 계룡산은 지맥이 통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또 신경준(申景濬)이 편찬한 산경표(山經表)에서도 금남정맥(錦南正脈)은 마이산(馬耳山), 주줄산(珠崒山)~개태산(開泰山), 계룡산(鷄龍山)으로 이어지는 산맥이라 실려 있다. 그런가 하면 『성호사설』의 ‘신도한도(新都漢都)’편에는 ‘풍수가들은 금강을 소위 반궁수(反弓水, 강의 흐름이 도읍지를 겨누는 모양)형이라 부르는바, 송도뿐만 아니라 한양까지를 겨누는 형국으로 계룡산의 신도(新都)에도 또한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라고 적고 있다. 마이산에서 발원하는 금강이 반궁수(反弓水) 형국이라고 한다면, 마이산에서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은 화살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이 지세는 송도나 한양을 국도로 둔 고려나 조선왕조에게는 불길한 형국일 수 있고, 화살촉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하는 신도(新都) 역시 좋을 리가 없다고 보는 해석이다. 이러한 <신도한도>의 기술과 비슷한 사례가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에도 등장한다. 즉, 훈요십조 제8훈(訓)에 ‘차현(車峴, 천안시 광덕면과 공주시 정안면 사이에 있는 고개) 이남 공주강 외(公州江外, 금강 아래쪽을 말함) 지방은 산형지세가 대부분 배역(背逆)의 형세이므로 인심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운운’하고 유촉(遺囑)하고 있는 것이다. 또 호남지방의 강물이 사방으로 흐르는 모양을 두고 ‘산발사하(散髮四下)’의 흉국(凶局)이라고 『성호사설』에서 지적하고 있는데, 산발사하란 물길이 동쪽으로, 북쪽으로, 서쪽으로, 남쪽으로, 흩어져 따로 놀기 때문에 항심(恒心)이 없고 인심이 사납고 교활하다고 보는 풍수사상이다. 마이산은 동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감돌아 흐르는 금강의 발원이기도 하고,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으로 흐르는 섬진강의 발원이기도 하며, 서쪽으로 흐르는 만경강의 발원지와 이웃하고 있기도 한 지형이니 산발사하(散髮四下)의 중심에 있는 형국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산을 소용돌이치는 흉국의 중심지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진안(鎭安, 진정시키다)이라는 보통명사를 지방의 지명으로 채택한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위에 예거한 두 가지 풍수설이 조정에서 공론화 되었거나 왕조에서 알고 있었다면, 이러한 특수한 지역을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럴 경우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비보(裨補)를 했으리라는 것이 정설이다. 비보는 도참설이 전래된 이후 조선 초기까지의 국토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마이산에는 어느 시대였건 어떤 형태로든지 비보가 행해졌으리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만일 비보가 행해졌다면, 마이산에는 흔한 것이 바위와 돌들이니 이러한 자연석을 재료로 하여 요소에 돌탑을 조성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조성비용이나 유지비용이 덜 드는 방법으로 여겨졌을 것임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만약 비보 목적의 적석이라고 한다면, 조성연대와 조성자에 대한 의문이 당연히 대두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기록은 전무하다. 그렇다면 탑을 해체하여 탑재(塔材)인 자연석들을 방사선 투시방법과 같은 분석과학으로 알아볼 수 없는가 하는 의견도 대두되지만, 이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일뿐만 아니라 그리한다고 해서 정확한 연대를 알아낸다는 보장도 없다. 다만 육안으로 보더라도 탑의 탑신부는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음직하다는 느낌은 받는다. 이러한 조건에서 유추한다면 적어도 조선초기 이전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조선초기 이후에는 국도(國都)에 관한 논의가 더 이상 없었고, 비보(裨補) 사상도 왕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라면 적석의 조성자는 당연히 왕조에서 파견한 지관(地官)을 비롯하여 석축에 능숙한 전문가들일 것이다. 여기에서 지방관(地方官) 등의 관여는 없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지방관이 관여했다면 고을 백성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고을 백성의 수준으로는 이만한 석축을 해낼 능력이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고, 또 만일 백성이 동원되어 역사(役事)를 했다면 이러한 사실이 구전으로나마 전승(傳承)되었어야 마땅할 것이지만, 그러한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돌탑들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시대는 도참설이 풍미하던 신라 말에서 조선 초까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진안지방에는 조선 태조와 마이산과 관계된 설화가 많이 전래한다. 마이산의 이명(異名)은 속금산(束金山)이라고도 하는데, 속금산(束金山)은 오행(五行)에서의 금(金)기운을 묶는(束) 산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을 조선 태조가 사명(賜名)했다는 것이다.(이 부분이 『진안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또 조선 태조가 지었다고 전하는(실제로 조선 태조 자신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天馬東來勢已窮/ 霜蹄未涉蹶途中/ 涓人買骨留其耳/ 化作雙峰屹半空.” 이를 풀이하면 “천마가 동쪽으로 와 형세가 이미 궁하니/ 흰털 말발굽 더 건너지 못하고 도중에 쓰러졌네/ 연인(내시)이 뼈는 사가고 그 귀만 남기니/ 변하여 두 봉우리 되어 반공 중에 솟아있네.”라는 뜻이 되는데 이 시는 은유적인 수법으로 마이산의 풍수를 논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 뜻을 더 풀어보면 “천마(天馬)가 동쪽으로 오다가 형세가 궁하여 쓰러진 곳은 마이산인데, 궁인(宮人)들이 와서 이곳에 비보조치를 하고 가니(뼈를 사가니) 두 봉우리만 반공(半空)에 솟아있다”라는 뜻이 된다. 이 시의 작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조선 왕조에서 마이산에 비보조치를 했던 사실을 알아챈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발설하면 신상이 위험할 것이므로, 시 자체를 아예 조선 태조가 지은 것처럼 세상에 내놓아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할 때, 조선 태조가 국도(國都)를 새로 정할 때 한양이나 계룡산의 신도(新都)에 불길한 형국인 반궁수(反弓水)의 시원(始原)인 마이산에 비보(裨補)를 했던 바, 그 비보물이 바로 ‘천지탑’이라는 추정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다.【이갑룡(李甲龍)의 축조 가능성】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바로 ‘천지탑’이 소재하는 곳의 사찰인 탑사(塔寺)측의 주장은 이와 다르다. 탑사에 세워진 ‘도사 이갑룡선생 사적비(道士李甲龍先生事蹟碑)’에는 적석을 이갑룡이 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갑룡 이전에 적석들이 존재했다는 기록과 증언이 있으므로 이갑룡 축조설에 대한 전폭적인 동조는 곤란하다. 먼저 그 기록을 살펴보면, 마령면에 살던 하립(1769~1831)의 문집에 “束金山裡 塔重重/ 紅樹陰中 聽晩鍾”이란 시구가 기록되어 있다. 풀이하면 “속금산 속에 탑이 중중(重重)히 서 있는데/ 단풍나무 숲 속에서 저녁 종소리 듣네”가 된다. 여기에서 속금산(束金山, 마이산의 이명) 속에 중중(重重, 여러 개가 겹친 모양)히 서있는 탑이란 이곳 천지탑과 주변의 탑말고는 어떠한 다른 가능성도 상정(想定)할 수가 없다. 작자(作者) 하립은 1831년에 별세했으니, 이갑룡(1860~1957)이 태어난 해보다 31년 전이다. 또 이갑룡 이전에 이 자리에서 탑을 보았다는 고로(古老)들의 전언도 있으므로 적어도 이갑룡의 손으로 탑들이 초창(初創)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또 천지탑과 같은 대형 구조물인 경우, 혼자의 힘으로는 축조할 수 없다는 경험칙도 이갑룡이 조탑하였다는 주장을 배척하는 이유이다. 다만 이갑룡이 이곳에 살면서 부단히 무너진 탑을 보수하고 일부 새로운 탑을 쌓기도 했던 사실만은 인정할 수 있다. 천지탑에 관련해서도 탑신과 상부 1/3 이상의 축조 기법이 다르므로 상부 1/3 부분은 이갑룡에 의하여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갑룡, →탑사.《참고문헌》마이산 학술연구(진안문화원, 2002)
  • 마령면 마이산남로 132(동촌리 78)에 소재한 열성(列聖)과 명현(名賢)·우국지사(憂國之士)를 봉안한 묘우(廟宇). 자세한 내용은 <문화유산> [사당] [이산묘]에 수록됨.
  • 백운면 반송리 360-2. 반송마을앞 백장로 큰길가 구남각(龜南閣) 안에 있는 비. 1992.6.20. 전라북도 지방 기념물 81호로 지정되었다. 비표는 忠翼公晩六崔先生瀁遯跡遺墟碑(충익공만육최선생양둔적유허비)로 1871년 건립되었다. 이 비는 만육(晩六) 최양(崔瀁)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과 인근의 주민들에 의해서 고종 8년(1871)에 건립되었다. 노사 기정진(盧沙奇正鎭)이 글을 지었다. 비명(碑銘)은 충익공만륙최선생양둔적유허비명(忠翼公晩六崔先生瀁遯跡遺墟碑銘)이다. 자세한 내용은 <문화유산> [금석문]에 수록됨.《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주천면 대불리 산31-2 봉우재(818.5m)에 있는 봉수대. 1977. 12. 31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다. 국유(國有)로 진안군이 관리한다. 대불리와 무릉리의 삼거리에서 무릉리 쪽으로 600m쯤 가다가 왼쪽으로 난 임도가 있는데, 임도를 따라 올라가 종점에서 약 400m 쯤 능선을 따라 오르면 된다. 다른 코스로 대불리에서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서쪽 싸리재 밑에 있던 예전의 윗진등마을 터를 거쳐 완주군 운주면과 경계를 이루는 작은싸리재를 통해서 가야 한다. 봉수대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크고 울퉁불퉁한 천연의 암석 위에 잡석으로 쌓아 올린 석축이다. 임진왜란 후 선조 28년(1595) 태평산성(太平山城)과 전주감영에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 세웠다고 한다. 그 모습은 대체로 네모꼴이지만 4변이 일정하지 않은데(높이 : 동벽 450cm, 북벽 360cm, 서벽 495cm, 밑변 : 동 1,020cm, 북 700cm, 서 1,050cm, 윗변 : 동 900cm, 북 640cm, 서 900cm, 남 680cm) 남쪽의 대부분과 서쪽 일부의 벽은 무너졌으나 나머지는 거의 완전하며, 가운데는 흙으로 채워져 있다. 올라가는 계단은 없고 남쪽이 출입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태평봉수대는 원래 봉화대가 아니라 성의 망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유는, 윗면까지 흙이 가득 채워져 있을 뿐 아니라 윗부분의 둘레 길이가 약 32m로서 이는 봉화둑으로는 너무 작으며 실제로 그 위에는 봉화를 올리기 위한 어떤 시설물도 없었고 또한 설치할 수도 없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설물을 태평봉수대라 부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태평(太平)은 대평(大平)과 통하거니와 이곳 대불리(大佛里)를 예전에는 대평(大平)이라고 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실상 대평은 대불리의 옛 이름인 대벌(大伐)과 맥이 닿아있다. 벌(伐)은 들(坪 또는 平)의 음차(音借)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봉수대’에서 연락했다는 위의 태평산성은 다른 곳이 아닌 대불리에 있었던 것임을 추측할 수 있으며, 어쩌면 대불리 신기마을 서남쪽에 있는 성재산(786.1m)에 있는 성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로 말미암아 지금의 석축을 ‘태평봉수대’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앞으로 이 석축의 성격은 더 깊이 조사·연구할 필요가 있다. →봉수.《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문화재청(http://www.heritage.go.kr/heri/idx/index.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