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천면 금평1길 10-8(주양리 135) 주자천변에 있는 서숙(書塾). 1984. 4. 1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광산 김씨 종중이다. 건물은 도리 기둥에 난간을 갖추고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앞면 3칸, 옆면 3칸, 처마넓이 123㎡의 건물이다. 중앙에 전후퇴 형식의 방이 있고, 나머지는 마루이며, 방에는 4합문이 달려 있다. 관리인의 집인 부속 건물 1채가 딸려 있다. 조선 인조 15년(1637) 긍구당 김중정(金重鼎)의 사숙(私塾)으로 건립되었고, 그 후 340여 년 동안 많은 문인 학사들을 배출한 학당이다. 김중정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조부 김충립과 함께 생장지인 서울을 떠나 36살 때인 1637년 주천에 들어와 은거하였다. 와룡암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썼는데, 김중정이 집필한 많은 저서는 여러 차례의 큰물에 휩쓸려 대부분은 유실(流失)되었다고 한다. 그가 세운 원래의 와룡암은 원래 주자천 건너편에 있었는데 물 때문에 오고 가기가 불편하였으므로 1827년(순조 27)에 김상원(金相元)이 지금 자리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근래에는 1965년, 1982년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건물은 도리 기둥에 난간을 갖추고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누각으로 그 전면과 마루의 벽에는 ‘기정(起亭)’ ‘와룡암(臥龍菴)’ ‘긍구당(肯構堂)’ ‘긍구당서(肯構堂書)’ ‘와룡암기(臥龍菴記)’ ‘용담와룡암서재상량문(龍潭臥龍庵書齋上樑文)’, ‘와룡암흥학계서(臥龍菴興學契序, 1851)’ ‘주천사중수기(朱川祠重修記, 1972)’ ‘주천서원기(朱川書院記, 1975)’ 등의 현판과 판액(板額) 그리고 ‘와룡암중수기(臥龍菴重修記, 1965, 1982)’ 두 판액(板額)이 걸려 있다. ‘기정(起亭)’ ‘와룡암(臥龍菴)’은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휘호이고 나머지 큰 글씨는 김기열(金箕烈)*이 쓴 것이다. ‘와룡암기’, ‘와룡암중수기’는 초서로 쓴데다 판액(板額) 앞을 그물로 가려 판독하기 힘들어 생략하고, 긍구당 김중정이 직접 편술한 ‘용담와룡암서재상량문’과 판액 중 판독이 가능한 ‘와룡암흥학계서’와 ‘와룡암운(臥龍菴韻)’을 싣는다.
*이재(李縡, 1680~1746)은 조선의 학자이다. 본관은 우봉.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庵)·한천(寒泉)이다
*김기열은 ‘와룡암 흥학계서’ 에서 와룡암의 주인으로 나온다.
[[龍潭臥龍庵書齋上樑文]] 述夫 天慳爽塏 星逵掩小微之精 地秘神皐 后媼藏大靈之域 勝地 盖待時而顯 景物 亦賴人而名 龍門八節灘 得伊川而騰彩 武夷九曲水逌考亭而馳芬 非徒取玩景之資 所以爲養心之具 況復進德修業之道 會友以文 化民成俗之方 勸學爲本 家庠黨塾之設 自古皆然 秋禮冬詩之場 在今可闕 顧惟潭縣之特地 最是龍巖之別區 群峯北來 分德裕(山在茂朱東南間指點相對)之灝氣衆壑西注 匯楚江(朱子川下流 爲文義荊江 故曰楚江)之靈氣 這間開數里芳洲其上有半日(川源之上 有半日岩 岩石奇怪)異境 千回鐵壁 恰作人間活屛 萬朶瑤鬟 幻做象外新盡禹斧當日劃蒼崖而分排 秦鞭昔年走雲根而劈立 彩雲徘徊於甑岫 錦瀾澄淸於釜淵 上下晴沙 與眠鷺而分白 遠近芳草 入翠渚而共靑 一帶 領山野之光 四時 異林壑之色 水底紅錦 春濃雨初之花 巖上丹楓 秋染霜後之葉 桃源鷄犬 豈識秦漢之兵 橘州膏膄 自無庚癸之患 耕雲釣月 堪作葛天羲皇 絶世遺芬 不必蓬萊方丈 是有昔人之徽躅 尙傳古老之美談 金剛窟(半日岩上 有石窟 或傳云鑿金窟)中 石帶 李相國(名不傳)之遺跡 玉筍峯下樹 老鄭處士(名之升 號叢桂堂 古硤今存 後孫 性愚 守錦山時 立石以誌焉)之舊墟 蘇仙 泛舟之前 赤壁之風景雖美 李白 題詩之後 黃鶴之聲價益增 況有地名之起 余允爲後學之加敬 道窟 脈連於顔洞 氣像巖巖 程川 派接於朱溪 源流混混 谷號雛鳳(華山之東 有鳳巢洞) 況聞三笑之歌 巖名臥龍 緬憶五噫之詠 鄭康成之北海 里號猶取於得仁 段干木之西河 鄕名但欽其明德 矧乎五先生名號 萃此十餘里江山 慕古興懷 可振文獻之俗 顧名思義 堪爲俎豆之鄕 第恨千萬古名區 尙欠一二間臺榭 淸風明月 謾休野鹿林禽 美水嘉山 虛鎖朝嵐暮雨 騷人墨客 幾往來而興嗟 樵夫漁郎 置尋常而莫顧 幸有二三子吾黨 丕振數百年頹風 學所以三代共之欲 刱魚千里之所 敎不可一日無也 擬構鳥數飛之齋 捐廩鳩工 太守有西蜀之化 出錢董役 隣儒起東魯之思 新甫栢徂徠松是尋是尺 立高棟於林端 離婁繩公輸墨 如暈如飛 抗雕樑於巖表 山靄入戶晦繁文而愈奇 水霧縈簾 呈至素而益麗 簾幕朝捲 影落老蛟之宮 絃歌夜調 響徹溪女之室 廣如也 奧如也 可育英才 詠於斯 遊於斯 庶庇寒士 討無極太極之至理 倣鵝湖之講堂 論伯子叔子之格言 效寒泉之精舍 一變荊榛之地永作菁莪之基 君子居之 習俗佇歸於淳古 吾道南矣 士民何患於瞽盲 學孔希顔須知寸陰之可惜 侵情觸眼 自無一塵之或滓 三千秋之鳥鳴 會待他日 九萬里之鵬路 應有背風 若余者 天地腐儒 江湖浪跡 滕閣落霞之詠 實慚王勃高才蘭亭修竹之文 敢擬右軍健筆 但念吾祖昔日 酷愛此地風烟 素履黃冠 結幽期於南麓 紅塵白眼 辭薄遊於東華 背山臨流 始闢仲長統之宅 耕田鑿井 長遺龐德公之安 一邱烟霞 領得世間淸福 萬軸書卷 藏爲身後墨庄 嗟呼, 興廢之關人 久矣, 肯構之忝祖 蘭逕蕪沒 無復昔時鳩 笻桑陌悽凉 作爲他人鵲棲(肯構堂公 歸洛第 晩年以朱子川墓下 故復卜居此) 瞻遺墟而抆血 物是人非 撫往事而傷心 鳥啼花落 故當虹樑修擧之日 倍切鯫生悲喜之情 聊陳六偉 敢贅一語, “阿郎偉抛樑東 玉筍高峯出半空 不琢不成混潤采 且將 一簣不虧功 阿郎偉抛樑南 朱子川流碧似藍 至理元來歸末合 顔程一脈接成三 阿郎偉抛樑西 半日靈區石磴梯 上有仁山明道德 誰能勞力一攀躋 阿郎偉抛樑北 回首斗邊舊京國 我祖崇禎解紐年 憶曾嘉遯此遊息 阿郎偉抛樑上 一羽雲宵萬古仰 巖石人猶愛惜之 臥龍頭角自然狀 阿郎偉抛樑下 數仞墻正高瀟灑 希聖希賢在此中 庶將濂洛舊儒雅” 伏願上樑之後 神降嘏福 地孕精英 叩篋摳衣 列粉袍於絳帳 博文約禮 聚靑襟於緇帷 今人與居 古人與稽 顧勉强耳 達時所施窮時所養 殆庶幾焉.(遺稿失 舊本謄本觧亦佚 故僭竊補末).
【풀이】 다음과 같이 기술하노라. 하늘이 아낀 앞이 탁 틔어 밝은 땅 별은 소미성(小微星) 정기 덮였고, 땅이 숨긴 신기한 물줄기 토지신(土地神)이 크게 신령한 지역 감추었네. 명승지는 대개 때를 기다려 나타나고, 경치는 또 사람을 힘입어 이름이 나니 용문괄절탄은 이천(伊川)을 얻어 빛이 났고, 무이구곡수는 고정(考亭)으로 인해 향기났으니, 한갖 구경하는 자료로만 함이 아니라 마음을 기르는 도구로도 삼나니, 하물며 다시 진덕수업(進德修業)하는 방도(方途)는 벗을 글로 모으고 화민성속(化民成俗)하는 방법은 권학으로 근본을 삼는다. 집 서당과 마을 서당 설립함은 예로부터 모두 그러했는데, 추례동시(秋禮冬詩) 장소를 이제라고 어찌 없겠는가? 생각해보면 용담에서 특지는 용암이 가장 별구이다. 여러 산봉우리가 북에서 오니 덕유산(산이 무주 동남간 지점에 상대하였음) 밝은 기운 나누었고, 여러 골짜기 서쪽으로 흐르니 초강(주자천 하류가 文義 荊江이므로초강이라 함)의 신령한 기운이 돌아 흐르네. 그 사이에 길게 뻗은 꽃 같은 모래톱이 열렸고, 그 위에 반일암(냇물 상류에 반일암이 기이하게 서 있다) 기이한 경치 있어 천 번이나 두른 철벽은 흡사 인간세계의 병풍같고, 만떨기 아름다운 머리쪽 같이 교묘하여 세상 밖의 새 그림을 지었네. 우(禹)임금 도끼로 창애를 깎아 분배한 듯 진나라 만리장성 쌓을 때 바위 쪼개어 세운 듯 채색구름 시루봉(甑岫)에 배회하고, 비단물결 가마못(釜淵)에 맑구나! 위아래 밝은 모래, 조는 갈매기와 나뉘어 희고, 원근의 방초(芳草)는 푸른 물가에 들어와 같이 푸르네. 일대는 산야의 빛을 받았고, 사시에 숲과 골짜기의 빛이 다르구나. 물밑에 붉은 비단은 봄비 촉촉이 내린 뒤에 핀 꽃이요, 바위 위의 단풍은 가을서리 뒤에 물든 잎이라. 도원(桃源)의 닭과 개가 어찌 진한(秦漢)의 병란을 알며, 귤주(橘州)가 기름지니 이제 경계(庚癸, 곡식과 식수)의 걱정이 없네. 경운조월(耕雲釣月)하니 갈천씨 희황씨 백성을 지었고, 세상에 뛰어난 향기는 반드시 봉래방장이어야 하겠는가? 여기에 옛사람 아름다운 자취 있고, 아직도 옛 노인의 미담이 전해오네. 금강굴(반일암 위에 석굴이 있는데, 금 캐던 굴이라 전해온다) 가운데 돌은 이정승(이름은 전해지지 않음)의 유적이고, 옥순봉 밑의 나무는 정처사(이름은 지승(之升)이고 호는 총계당(叢桂堂)이니 예전 돌이 있고 후손 성우(性愚)가 금산(錦山) 원(員)으로 있을 때 돌을 깎아 세웠다)의 옛터에서 늙었네. 소동파가 배 띄우기 전 적벽강에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이태백이 글쓴 뒤에 황학루에 성가가 더했네. 비록 지명이 나를 흥기시켰으되 진실로 후학이 공경을 더하네, 도굴(道窟)은 맥이 안동(顔洞)에 연했으니 기상이 높고, 정천(程川)의 줄기는 주계(朱溪)에 접했으니 원류가 끝없이 세차게 흐르네. 골짜기 이름 추봉(鄒鳳, 화산 동쪽에 봉소동이 있음)이니 황연히 도연명의 삼소(三笑)노래 듣는 듯, 바위이름 와룡(臥龍)이니 후한 때 양홍의 오희곡(五噫曲) 생각나네. 정강성의 북해(北海) 마을이름은 오히려 득인(得仁)함을 취함이요, 단간목의 서하(西河) 고을이름은 그 명덕(明德)을 흠모함이라. 진실로 다섯 선생의 이름이 이십여 리 강산에 모였구나! 예를 사모하고 생각을 일으키니 문헌의 속됨을 진작시킬 것이요, 이름의 뜻을 생각하니 제사 지내는 고을이 되리라. 다만 천만 세월에 걸친 명구(名區)에 한두 칸 누각 없음이 한이로다. 청풍명월에 부질없이 들사슴 수풀 사이에 쉬고 아름다운 강산이 헛되이 아침 아지랑이 저녁 비에 잠겼으며, 시 짓는 사람과 글씨 쓰는 사람이 몇 번이나 왕래하며 감탄하고, 나무꾼과 고기 낚는 사람 심상하게 여겨 돌아보지도 않는데, 다행히 두 세 사람 우리 친구 있어 수백 년 무너진 풍속을 크게 일으켰네, 학문은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와 같이 하니 고기 천리에 노는 곳 창설하려 하고, 가르침은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새가 자주 나르는 집을 지으리. 곳집 덜어 집 짓는 기술자를 모으고, 고을 원이 서촉의 덕화 있어 돈을 내어 역사 도우니 이웃 선비등로(東魯)의 생각 상기하네. 신보산의 잣나무 조래산의 소나무 여덟 자 한 자 되니 높은 들보 숲 끝에 셨고, 이루(離婁)의 먹줄과 공수(公輸)의 먹은 높고 높아 아찔하고 꿩 같이 나르는 듯 마롯대에 새겨 세웠네. 산 아지랭이 집에 들어오니 문채 어두워도 더욱 기이하고, 물위 안개 주렴에 얽히니 지극히 희게 나타나니 더욱더 곱구나. 주렴을 아침에 걷으니 그림자 늙은 교룡(蛟龍)의 궁전에 떨어지고, 거문고(絃琴)소리 밤에 들리니 시내의 여인의 집[백낙천(白樂天)의 비파행(琵琶行)에 나옴]에 울리네. 넓기도 하고, 깊기도 하구나! 가히 영재를 기를 만 하고, 여기에서 읊고, 여기에서 노니 거의 한사(寒士)를 비호하네[두보(杜甫)의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에 나옴]. 무극(無極), 태극(太極)의 이치를 토론하니 아호(鵝湖)의 강당을 모방했고, 백이 숙제의 격언을 의논하니 한천(寒泉)의 정사를 본받았네. 가시밭을 쳐내어 일변시켜 많은 인재의 터전을 영원히 만들었네. 군자가 거처하니 습속이 옛날의 순박함으로 돌아가고, 우리 도(道) 남으로 오니, 사농공상(士農工商) 사민(四民)이 어찌 문맹을 걱정하리. 공자(孔子)를 배우고 안자(顔子)를 바라니 반드시 촌음이 아까움을 알게 되어, 정을 모으고 눈을 붙이니 한 점 티끌 찌꺼기도 없네. 삼천 년만에 새들이 노래하네. 마침내 타일(他日) 붕새의 길을 기다려 바람을 등지니, 나 같은 사람은 천지에 씩은 선비요, 강호에 방랑하는 자취라. 등왕각의 노을 읊음은 실로 왕발(王勃)의 높은 재주에 부끄럽고, 난정에 긴 대나무 글은 감히 왕희지(王羲之)의 건필에 비교하리. 다만 할아버지가 이 땅의 풍연을 극히 사랑하여 무늬 없는 무지신과 야인(野人)의 노란 관(冠)으로 남쪽에 숨어살며, 더러운 세상을 백안시하는 마음으로 서울에서 사는 것을 사양했네. 산을 등지고 물에 임하니 중장통의 집을 연 듯, 밭 갈고 우물 파니 방덕공의 편안함을 남긴 듯 한 언덕, 구름 연기는 세간의 청복을 얻은듯 만 권 서책은 신후묵장(身後墨庄)에 감추리. 슬프다! 흥폐는 사람에 매었고, 오래 되었도다! 긍구가 할마버지 욕되게 함이여 난초길 묵었으니 다시 옛적 구공(鳩笻)이 없고, 뽕나무밭 처량하니 다른 사람이 살게 되었네(긍구당 공이 서울에서 돌아와 만년에 주자천 묘 밑에 집을 짓고 다시 여기에서 살았다). 유허를 쳐다보고 피를 씻으니 사물이 옳고 사람이 그르며, 지난 일을 생각함에 마음이 상하니 새 울고 꽃 떨어지네. 그러므로 상량하는 날을 당하여 어리석은 사람의 슬프고 기쁜 점이 배나 간절하네. 진실로 육위노래 갖추어 감히 한 말을 붙이네, 어기영차! 동쪽에 던지자![阿郎偉抛樑東]* 옥순봉 높은 봉우리 공중에 솟았네. 쪼지 않으면 따뜻하고 화기있는 채색 이루지 못하나니. 또 한 삼태기 가지고 공을 무너뜨리지 말라. / 어기영차! 남쪽에 던지자! 주자천이 푸르게 흘러 쪽과 같네. 이치가 원래 끝에 가서 합하나니, 안자(顔子) 정자(程子) 한 맥으로 셋을 이루었네. / “어기영차! 서쪽에 던지자! 반날 신령한 구역에 돌 사다리 놓였네. 위에 인산(仁山)이 있어 도덕을 밝히니 뉘 능히 노력하여 한번 오를까. / 어기영차! 북쪽에 던지자! 북쪽에 북두를 돌아보니 옛 서울일세. 우리 할아버지 숭정(崇禎, 명나라 황제의 마지막 연호)에 인끈 풀던 해라. 일찍이 숨어서 이곳에 놀던 일 추억하네. / 어기영차! 위로 던지자! 한 깃 하늘 만고에 우러르네. 암석을 사람들 사랑하고 아끼니 누운 용머리 뿔 자연한 형상일세. / 어기영차! 아래로 던지자! 두어 길 높은 담 정히 깨끗하다. 성(聖)을 바라고 현(賢)을 바람이 이 가운데에 있으니, 장차 중국의 주렴계(周濂溪)와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이 살던 염락(濂洛)에 옛 선비 되리. / 엎드려 원하노니 상량한 뒤에 신은 복을 내리고, 땅은 정영(精英)해질 지어다 학과(學科)를 시작할 때, 북을 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책 상자(冊廂子)를 열어 책(冊)을 꺼내게 하고, 옷의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게 하고, 글씨 공부하는 분판(粉板)을 붉은 장막에 늘어놓고, 박문약례(博文約禮)로 유생들을 검은 장막에 모으네. 지금 사람 더불어 살고, 옛사람 더불어 상고하리라. 다만 힘써 공부할 뿐, 현달했을 때 베풀고 궁박할 때 기르면, 아마도 기약할 수 있으리라.”(와룡암 벽면의 판액(板額)에는 “유고가 실전되고 구본(舊本) 등본(謄本)도 뜯어져 산일(散逸)되어 외람되이 끝부분을 보유(補遺)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 끝부분이란 “아랑위! 포량서……”부터 말미까지이다.)
*아랑위(阿郎偉)는 여럿이 힘을 모을 때 쓰는 감탄사 ‘어기영차’를 한문으로 표현한 글이고 포량동(抛樑東)은 ‘대들보 동쪽에 던지다’이다. 상량식을 할 때 떡이나 만두 같은 음식을 사방으로 던지는 관습에서 유래한 말이다.
【臥龍庵興學禊序】 臥龍庵在朱子川 肯構堂金公諱重鼎卜築而爲家塾焉. 昔晦庵先生得臥龍潭於廬山之麓, 畵武侯像而祠之, 榜之曰臥龍庵. 蓋意有在也. 噫, 先生當靖康南渡之際, 矢志於興復中原, 則嘐嘐千古, 所與尙友者武侯故也. 然則不講乎春秋尊攘之義者, 烏足與語臥龍庵之蹟乎? 歸來我東, 有大老尤翁先生得其旨焉. 知縣在京, 聞是縣之有三川武侯祠, 意謂其龍潭之故而爲是也. 復豈知朱子川之有臥龍庵也哉! 地名之相符者 殆若天設而然也. 戊申夏四月知縣荏玆, 旣愛其山川之邃閟, 又樂其峽俗之醇古, 武城澹臺, 尙矣未聞, 而潮州趙悳, 庶幾可見. 一日, 金大士箕烈甫, 踵門獻刺, 延之款浹, 乃臥龍庵主人也. 其飭躬雅操, 實爲一縣之望, 由是源源, 而近又袖一冊子以示曰, 此乃臥龍庵興學禊事實也, 請爲文而弁卷. 余敷衽而作, 攷其顚末, 其刱立之鞏厚, 節目之詳備, 有足以動人將詡者也. 重修於丁亥而訖功於辛卯, 則豈非誠力之勤摯者乎? 定禊於己亥而講信於庚子, 則豈非經紀之深遠者乎? 而況水石古奇, 棟宇縹緲, 先賢杖屨之遺躅, 至今未泯, 政合後人藏修之所者乎? 且其立議於勸進後生, 與鄕中讀書之士, 鳩財設禊, 俾成講習之資, 以范氏七戒, 揭于壁上, 常目矜式, 而春秋講會之席, 老少之序齒, 賓主之退讓, 無或參差, 則此非徒以文會友也. 持心礪行, 庶爲鄕人之標準, 而絃誦之聲, 無時不洋洋, 鄒魯之遺風, 於斯焉復見, 猗乎盛哉! 若大士者, 不徒得臥龍庵之勝, 而兼得其鹿洞竹林之遺意也歟. 知縣之來此, 其勸學之政, 蔑如也. 不能與長老諸生, 習鄕樂之歌, 飮獻酬之酒, 以詠歌先王之道以導之, 則聞此盛擧, 烏可無嘉歎底意也. 竊爲蒙士興起之道, 精略事實, 以章誘掖之契意焉. 辛亥仲夏 唐城后人 洪鍾馨.
【臥룡암 흥학계 서】 와룡암(臥龍庵)은 주자천(朱子川)에 있는데 긍구당(肯構堂) 김공(金公) 휘(諱) 중정(重鼎)이 건축하여 가숙(家塾)으로 삼았다. 옛날에 회암(晦庵 주자(朱子)를 말함) 선생께서 여산(廬山)의 산기슭에서 와룡담(臥龍潭)을 찾아내어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을 말함)의 초상(肖像)을 그려서 사당을 만들고 ‘와룡암’이라고 방(榜)을 붙였는데 대체로 의도한 바가 있었다. 아, 선생께서 정강(靖康) 연간에 황제가 남쪽으로 피난할 때를 당하여 중원(中原)을 다시 일으키려고 맹서하셨으니 천고(千古)에 우렁차게 소리치면서 더불어 상우(尙友)한 자가 무후(武侯)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춘추(春秋)』에 말한 존양(尊攘)의 의리를 강론하지 않는 자는 어찌 족히 더불어 와룡암의 사적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대로(大老)인 우옹(尤翁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을 말함) 선생께서 그 뜻을 터득하였다. 내[필자]가 서울에 있을 때 이 진안현(鎭安縣)에 삼천 무후사(三川武侯祠)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용담(龍潭)이 있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고 여겼는데 다시 어찌 주자천에 와룡암이 있을 줄을 알았겠는가? 지명(地名)이 중국과 서로 부합한 것은 아마 하늘이 만들어서 그러한 것이라고 본다. 무신년 여름 4월에 내가 이곳에 부임하였는데, 이미 산천이 으슥한 곳에 숨어있는 점을 사랑하였고 또 산골의 풍속이 순박하고 고아(古雅)한 점을 즐거워하였다. 무성(武城)의 담대(澹臺)*는 워낙 오래된 일이어서 듣지 못하였거니와, 조주(潮州)의 조덕(趙悳)에 대해서는 아마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대사(大士) 김기열(箕烈)이 우리 집에 찾아와 명함을 내밀었는데 맞아들여 대화를 나눠보니 곧 와룡암의 주인이었다. 반듯한 몸가짐과 점잖은 지조가 참으로 용담현의 명사(名士)였고 이로 말미암아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는데 근래에 또 책자 하나를 소매춤에 넣어 가져와서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와룡암 흥학계(興學禊)에 관한 사실이니, 청컨대 글을 지어 서문(序文)을 삼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옷깃을 가다듬고 일어나서 그 전말을 고찰해보니 그 계를 창립한 것이 공후(鞏厚 공고하고 후덕함)하고 절목(節目)이 상세하게 구비되어 충분히 사람들을 감동시켜 장려할 수 있었다. 정해(1827)년에 중수(重修)하여 신묘(1831)년에 공사를 마쳤으니 어찌 정성과 기력이 부지런하고 진지하지 않겠으며, 기해(1839)년에 흥학계를 조직하여 경자(1840)년에 강신(講信)을 하였으니 어찌 설계한 것이 심원(深遠)하지 아니한가? 하물며 수석(水石)이 고기(古奇)하고 건물이 아름다워서 선현(先賢)들이 이곳에 놀러 다닌 자취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았으니 참으로 후세 사람들이 공부하며 수양할 장소에 적합하다고 하겠다. 또 그 수립한 논의가 후생(後生)을 진학하도록 권장하고 고을 안의 글을 읽은 선비들과 더불어 재물을 모아 계를 만들어서 강습할 자금을 만들었으며, 범씨(范氏, 송[宋]의 학자 범충)의 일곱 가지 경계(警戒)를 써서 벽 위에 내걸어 항상 눈으로 보면서 조심하였고, 봄과 가을에 강회(講會)하는 자리에서는 노인과 젊은이가 나이에 따르고 손님과 주인이 겸양하여 조금도 어긋난 일이 없었으니 한갓 글이나 짓자고 모이는 벗들이 아니었다. 초심을 유지하고 행실을 가다듬어서 거의 고을 사람들의 표준이 되었고 글 읽는 소리가 우렁차지 않은 때가 없어서 공자와 맹자의 유풍(遺風)을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으니 참으로 훌륭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김 대사로 말하자면, 한갓 와룡암의 승경(勝景)만 얻은 것이 아니라 그 백록동(白鹿洞)과 죽림(竹林)*의 유의(遺意)까지 아울러 얻었다고 하겠다. 내가 이곳에 부임한 뒤로 학문을 권장하는 정사는 없다시피 하여서 장로(長老) 제생(諸生)들과 더불어 향악(鄕樂)의 노래를 익히거나 주고받는 술잔을 마시면서 선왕(先王)의 도리를 읊음으로써 교도(敎導)할 수가 없었는데, 이 훌륭한 일을 듣고서 어찌 가상히 여기어 탄식이 우러나오는 뜻이 없겠는가? 나이 어린 선비들을 흥기(興起)시키는 방도로 삼으려고 사실을 간략하게 기술하여 후배들을 권장하고 이끌어주는 계의 뜻을 드러내어 알리는 바이다. 신해(1851)년 중하(仲夏)에 당성 후인(唐城后人) 홍종형(洪鍾馨)*이 쓰다.
*무성(武城)의 담대(澹臺): 담대는 담대멸명(澹臺滅明)을 말한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원이 되었는데, 공자가 ‘사람을 얻었느냐.’고 물으니 ‘담대멸명이라는 자를 얻었는데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절대로 저의 집에 오지 않습니다.’고 답하였다.”고 한다.
*죽림(竹林): 죽림서원(竹林書院)을 말함. 조선 인조(仁祖) 때 전라도 여산(礪山)에 건립한 서원으로, 1626년(인조 4) 황산사(黃山祠)로 창건되어 1665년(현종 6) 사액되었으며, 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김장생(金長生)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송시열(宋時烈) 등을 배향함.
*용담현령. 1848년 4월에 부임하여 1852년 12월에 이임하였다.
[와룡암 시운 판액(臥龍庵詩韻板額)]
朱子川邊春漲深 臥龍庵上夕雲陰 蕭條異代無窮感 擊節如聞老栢吟<寒泉>
주자천 가에는 봄철 물결이 깊고 / 와룡암 위에는 저녁 구름이 짙네 / 쓸쓸히 변해버린 세상에 감개가 무궁하여 / 무릎 치니 늙은 잣나무 노래 들리는 듯하네. 한천(寒泉, 도암 이재[李縡])
先生, 辛酉過此, 留題壁上, 余適知縣, 謹書揭板, 卽庚申春也
한천(寒泉, 李縡) 선생이 신유(1741)년에 이곳을 지나다가 벽 위에 이 시를 남겼는데 내가 마침 이 고을에 재임하면서 삼가 써서 판액에 내걸었으니 곧 경신(1800?, 1860?)년 봄이었다.*
*이재(李縡)가 신유(1741)년에 이곳을 지났다면 그 후의 경신년은 1800년, 1860년에 해당하는데 어느 해인지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이 글을 쓴 당시 용담현의 지현(知縣)도 누구인지 기명이 없어 확실하지 않다.
【敬次 板上韻】 朱川九曲武夷深 老栢幽篁依舊吟 往蹟悠悠摠爲感 臥龍梁父我同吟
先祖淸溪公, 寓居此地, 因名朱子川, 余今追慕, 繼以題詠 歲在庚申之春 朱東勳
[삼가 판상(板上)의 시(詩)를 차운(次韻)하다]
주자천의 아홉 구비는 무이구곡(武夷九曲)보다 깊숙하고 / 늙은 잣나무와 으슥한 대숲 노래를 변함없이 읊조리네 / 지난 날의 자취는 아득하여 모두 감격스러운데 / 와룡의 양보음(梁父吟)*을 나도 함께 중얼거리네.
선조(先祖) 청계공(淸溪公, 朱潛)이 이곳에 우거하여 주자천(朱子川)이란 이름을 얻었다. 내 이제 추모의 글로 제영(題詠)을 잇는다. 경신년 봄 주동훈(朱東勳, 미상)
*와룡(臥龍)의 양보음(梁父吟): 와룡(臥龍)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을 말한다. 제갈량은 몸소 밭을 갈며 ‘양보음(梁父吟)’이라는 노래를 곧잘 불렀다고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세상에 뜻을 펴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울울하게 사는 처지를 푸념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