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군수. 1907년 2월에 부임하여 1907년 5월 사직하였다.
-
1925~1971. 주천면 주양리 출신의 군인.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출전하였다. 해방 후에 육군에 입대, 6·25전쟁에 출전하였고 그해 12월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어 국방대학교를 졸업하고 3사단 부관부, 5군단, 육군본부 등에 관리 장교로 근무하다가 베트남전쟁에 파견되어 주월군사령부 부관 참모로 근무 중 1971년 헬리콥터를 타고 순찰하다가 순직하였다. 준장으로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鎭安郡史(진안군, 1992), 『진안의 맥』(진안군, 1982),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
진안현감. 1604년 7월에 부임하여 1607년 2월에 이임하였다.
-
용담현령.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1839~?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안유(安裕)의 19세손이고 안원현(安鎭賢)의 16세손이다. 부친은 안진현(安鎭賢)이다. 정천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참고문헌》
-
안왈오(1886~?) 용담군 이동면 내유곡 출신,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1906년 안왈오를 포함한 의병대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거의(擧義)한 후 무주(茂朱)에서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여러 명을 사살하였다. 9월 하순에는 장수(長水)를 점령하고 일본군 3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안왈오는 의병대에서 20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장수·진안·용담 등 부근 촌락에서 군자금 및 군수 물자를 수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8년 문태서(文泰瑞)의 호남의병단에 가입하여 의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태형(笞刑) 100도를 받는 고초를 당하였다.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자료집 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전북의병사』 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
용담현령. 1886년에 부임하여 1887년 청양현령으로 전임하였다.
-
안원필(1874~?) 용담군 이동면 내유곡리 출신, 문태수의진에 참여하여 전북 장수군 계북면 문성동 뒤의 덕유산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909년 5월 5일 밤부터 안원필은 고원중등 20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장수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9월 20일 체포되어 소위 폭동죄(暴動罪)로 기소되었다.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태형(笞刑) 100도(度)를 받았다. 201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공훈록
-
안일(1924.05.08.~2015.12.09.) 진안군 정천(程川)면 용평(龍坪)리 1002 출신의 애국지사, 1944년 전주사범학교 재학 중 동교생 백진우(白鎭禹)·한칠석(韓七錫) 등과 비밀결사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여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하던 안일은 1944년 동급생 백진우·한칠석 등과 함께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독서회를 중심으로 국제정세를 분석하면서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였고, 아울러 일반인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로 결의하였다. 1944년 10월 경, 이들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작성,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연락원과 연결되어 태극기와 애국가도 인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이 1945년 2월 일본헌병에 탐지됨으로써 안일은 헌병대 구치소에 수감되어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후 광복이 되면서 1945년 8월 17일 석방되었다. 199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용담군 이동면 유곡리 출신의병, 908년 초 문태수가 지휘하는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덕유산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유격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909년 9월 동료의병 20명과 함께 검거되어 10월 8일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참고문헌] 전북의병사 하
-
죽성군(竹城君) 안원형(安元衡)의 20세손이며,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 안주열(安周烈)의 아들이다. 1939년 군(郡)에 자작농토를 나눠줄 것을 청하여 정천면(程川面) 용평리(龍坪里) 일대에 혜택을 주었다. 그 공덕을 기리는 비를 길가에 세웠는데, 황재묵(黃在黙)이 찬한 음기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79~1910. 황해도 해주 출신. 한말의 교육가, 의병장, 의사(義士).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
안형(1926.11.08. ~ 1996.04.16.) 이명 안성(安盛), 진안군 정천면 용평리 출신의 애국지사, 1945년 2월 전북 전주공립농업학교(全州公立農業學校)에 재학 중, 동창생 정진호(鄭鎭浩) 등과 함께 일제 식민지하의 조선어말살정책, 창씨개명, 강제징용 등 일제의 식민지정책으로 인한 민족말살과 강제수탈이 심화되는 것을 비판하였다. 또한 장차 일제의 패망과 조국 독립에 대비할 것을 맹약하는 혈서동맹으로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다가 붙잡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약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월 17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검사의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95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진안현감. 1844년 7월에 부임하여 1846년 12월 통천부사로 전임하였다.
-
용담현령. 1689년 6월에 부임하여 1694년 4월 임기만료로 체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