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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3~1444.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성수면 좌포리에 세거하는 공주 이씨의 중시조이다. 자는 신지(新之), 호는 사봉(沙峰). 조부는 이운증(李堣曾)이며, 아버지는 이엽(李曄)이다. 1396년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에 보직되었으며, 사헌부감찰, 사간원우헌납, 장령, 사인, 집의, 좌사간대부, 형조참의 겸 지도관사(刑曹參議兼知都官事) 등을 역임하였다. 1415년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이 되고 좌부대언에 승진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이조참판을 거쳐 병조참판으로 전임되었고, 그 뒤 강원도관찰사, 예조참판, 대사헌, 동지총제를 역임하였다. 1430년 공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1438년 중추원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그 뒤 판한성부사, 인순부윤(仁順府尹)을 지냈다. 1442년 70세가 되어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지중추원사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판중추원사에 승진하여 궤장을 하사받았다.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공주의 명탄서원(鳴灘書院)과 충절사, 화순군 능주면 충현사, 성수면 좌포리 봉좌마을 뒤 충절사(忠節祠)에 배향되어 있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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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성수면 좌포리에 세거하는 공주 이씨의 중시조이다. 자는 경장(敬章), 호는 송은(松隱)이다. 고려 말 전공판서 정경공(貞敬公) 이엽(李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아우 이명덕과 함께 이색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정몽주와 친교를 맺은 사이였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적성감무를 거쳐 감찰어사 지제고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개성 만월대 아래에서 정몽주와 작별한 후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이천 산중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조선 태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은둔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기록은 고려조 충렬록에 기재되어 있다. 성수면 좌포리 봉좌마을 뒤 충절사(忠節祠)에 배향되어 있다.《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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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67년 1월에 부임하여 1872년 9월 처가 죽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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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1952. 자는 경하(景夏), 호는 국사(菊史). 직제학 이교(李校)의 후손이다. 이병은(李炳殷)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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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홍언(洪彦), 호는 국포(菊圃). 직제학 이교(李校)의 후손이며, 이병연(李柄淵)의 동생이다. 정귀영(鄭貴泳)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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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1876. 자는 광삼(光三). 문의공(文義公) 언충(彦冲)의 후손이다. 이병은(李炳殷)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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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치중(致仲),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해서 입당(笠堂)이 별호가 되었다. 일찍이 최익현(崔益鉉)에게 사사(師事)하고 그의 항일투쟁에 가담하였다. 최익현이 옥사하고 나라도 망하자 운장산에 칩거하여 나오지 않았으며, “태양을 우러르기 민망하다” 하여 늘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만덕산 아래로 이거하여 후진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였다. 1996년 성수면 중길리 상달마을에 제자들이 세운 추모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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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1950. 자는 명오(明五), 호는 횡계(橫溪). 판서 이귀산(李貴山)의 후손이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이영구(李永九)의 아들이다. 성품이 본래 베풀기를 좋아하여 가난하거나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적극 도와주었다. 정귀영(鄭貴泳)이 묘표를 찬하였고, 이병은(李炳殷)이 찬한 횡계당기(橫溪堂記)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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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1946호는 정은(靜隱). 정천면 봉학리에서 이기현(李基鉉)의 아들로 태어나 10세 때 주천면으로 이사하였다. 초등학교의 교장을 지낸 이상래(李祥來)의 부친이다.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15세 때 김태현(金泰鉉)에게 사사하였다. 주천면의 사립 화동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평생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 정은집(靜隱集)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 5권이 있으며, 서하집(西荷集) 11권을 편찬하였다. 그가 정은집을 집필하던 명덕정(일명 하정각)이 정천면 봉학리 상조림에 남아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향교,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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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78월에 부임하여 1881년 재임중 사망하였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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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67년 1월에 부임하여 1872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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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15년 6월에 부임하여 1818년 6월 강등되어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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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1907. 자는 의순(儀舜), 호는 괴원당(愧遠堂). 문의공(文義公) 이언충(李彦冲)의 후손이다.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도복(李道復)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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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32. 서울 출신. 독립운동가·의사(義士).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서울 용산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형 이범태(李範泰)와 같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大阪)’에서 철공소 직원으로 근무하던 중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기노시타(木下昌藏)’로 바꾼 뒤 ‘도쿄’와 오사카 등지를 전전하면서 노동 등의 막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을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 1931년 1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큰일을 수행할 것을 다짐하고 상해로 건너갔다. 김구(金九)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시키고 이봉창의 소신대로 일본 왕 폭살 계획을 추진하였다.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安重根)의 막내 동생 공근(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식을 마친 후 곧 일본 동경으로 향하였다. 1932년 1월 8일 일본왕 ‘히로히토(裕仁)’가 만주국 황제 부의(溥儀)와 도쿄 ‘요요기(代代木)’연병장에서 관병식을 할 때, ‘사쿠라다몬(櫻田門)’ 앞에서 관병식을 끝내고 돌아가는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히로히토를 명중시키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 해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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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19년 8월에 부임하여 1622년 8월에 이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