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0~? 한말의 동학운동가. 백운면 오정리 출신이다. 자(字)는 성필(聖弼). 보명(譜名)은 기풍(起豊)이며, 사명(士明)은 동학교단에서 내린 이름이다. 효녕대군 28세손 충경공파로 선대는 남원 둔덕에서 살다가 남원 아영면(당시는 운봉) 두락리에 자리를 잡았으나 언제인가 백운면 오정리로 이사하였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했다고 한다. 당시 오정리에 은거해 있던 전봉준을 만나 의기투합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동참, 남원지역 접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김개남의 남원 입성을 도왔으며, 10월 김개남의 북상 이후에는 남원성에 남아 박봉양(朴鳳陽) 민병과 싸웠으며, 진안의 접주로 활약하였다. 동학군이 패퇴하여 전봉준·김개남 등 영수급들이 차례로 처형되면서 이사명도 임실 오수면에서 잡혔으나, 혀를 깨물고 말을 하지 않으면서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부인 전주 최씨는 어린 아들 강엽(康燁, 당시 4살)과 딸들을 데리고 인근 백운면 분토동에 피신하였고, 자식들이 성장하자 마령면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용담현령. 1776년 1월에 부임하여 1779년 6월 임천군수로 영전하였다. 공조좌랑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
  • 1870~1917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순오(舜五), 호는 부재(溥齋).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헐버트(Hulbert, H. B)와 친교를 맺어 영어와 프랑스어 등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이(李珥)를 조술(祖述)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907년 6월경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여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노력하였다.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1614~1690. 조선 중기 진안에서 활동한 문신·학자. 자는 천득(天得), 호는 만암(晩庵). 시호는 충정(忠貞). 증조는 부윤 이정란(李廷鸞), 조부는 이종길(李遵吉), 부친은 참봉 이영선(李榮先)이다. 자손으로는 이우하(李宇夏)가 있다. 164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52년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 국가의 제반 사항을 논리정연하게 논평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 1654년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당시의 시사를 여러 차례 직언하였다. 헌종 때에는 이조참판, 대사간을 역임하고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당시 영남에서는 대동법(大同法)이 아직 시행되지 않아 정무가 매우 번거로웠다. 감사로 부임하여 대동법으로 일어난 송사 판결을 신속하고 조리 있게 처결해 송옥(訟獄)을 종식시켰다. 우수한 인재를 뽑아 쓰고 탐관오리를 숙정하고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으로 칭송이 도내에 자자했다고 한다. 1678년에 이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1680년 판중추부사로 옮기게 되었다. 1689년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함을 간언하다가 종성·북청·철원 등지로 귀양을 갔다. 이후 소결(疏決)로 용서되어 부여의 옛집에서 우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숙종은 과거를 후회하고 그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진안지』에는 “진안읍 연장리에 살았고, 훈련대장 전동흘(全東屹)과 친구였다”고 전한다. 1695년 청백리(淸白吏)에 선출되었다. 전주에 장보사원(章甫祠院)을 세우고, 1708년 북청에 있는 이항복(李恒福)의 사당에 함께 제사지내게 하였다. 1694년에 한계서원에 추가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명재유고(明齋遺稿)』,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 『국역 국조인물고』(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5)
  • 용담군수. 1900년 이후 부임하였으나 부임연대와 이임연대는 미상이다.
  • 용담현령. 1768년 7월에 부임하여 1771년 5월 사직하였다. 사헌부감찰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
  • 1878∼1914. 개항기 진안에서 활동한 의병. 1907년 9월 진안 마이산에서 거의하여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고 진안지역을 무대로 항일 투쟁을 하였다. 초명은 갑술(甲戌),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할아버지는 승문박사(承文博士) 이태환(李泰煥)이고 아버지는 이봉선(李鳳善)이다. 임실군에서 태어났다. 1906년 임실, 장수, 진안, 남원, 함양, 순창, 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였다.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 정부와 세계열강에게 격문, 통고문, 규탄문, 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 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자 음력 8월 “왜적을 물리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부모에게 하직 인사를 한 후 의병의 길로 나섰다. 같은 고향의 전기홍(全海山)이 서신을 보내 함께 거의할 것을 의논하였다. 그 때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기홍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지 않고 독자적인 의진 구축이 필요함을 절감, 8월 26일 고향으로 돌아갔다. 동지들과 함께 임실 상이암(上耳庵)과 황사현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 등 준비하는 가운데 의병을 불러 모았다. ‘의병창의동맹’을 결성하여 선봉, 중군, 후군, 참모, 총지휘, 연락, 도로부장, 보급, 운량 등으로 조직을 구성하고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기홍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 여운서(呂雲瑞), 김공실(金公實) 등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 남쪽 기슭의 용암(龍巖) 위에서 설단제천(設壇祭天)하며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고 외쳤다. 의진의 명칭을 ‘호남창의소’라고 했으며 자신은 ‘호남창의대장’이라 하였다. 이들은 대오를 편성한 후 진안읍을 공격하여 분파소와 우편물취급소, 일본어 통역의 가옥 등을 불사르고 통신선을 절단하였으며 일진회 사무소의 깃발을 내리게 하였다. 용담에서 활동 중이던 김동신 의병부대와 합진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잘 진행되지 않았고 와중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그러나 임실, 진안, 장수, 운봉, 남원, 곡성, 정읍 등 주로 전라도 동부 산간 지역을 무대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구례로 이동해 온 고광순 의병부대와 연합을 모색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아 1909년 음력 3월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였다. 1911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 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1912년 겨울 국가를 되찾기 위해 비밀결사를 결성, 중국으로 망명한 후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중국에서 활동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정동석을 찾아갔다가 성수면 삼봉리에서 밀고 당하여 일경에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살인, 방화, 강도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1914년 4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천고의 강상을 짊어짐은 중요하고/ 삼한의 해와 달은 밝게 비치는데/ 외로운 신하 만 번 죽어도 마음 변치 않으니/ 사람으로 머리 숙여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전북 진안지역 근현대 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홍영기 『한말 후기 의병』(독립기념관 한사학』2, 198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용담현령. 1877년에 부임하여 1878년 김해현령으로 전임하였다.
  • 진안현감. 1754년 8월에 부임하여 1759년 5월 안성으로 전임하였다.
  • 용담현령. 1682년 7월에 현풍에서 전임하여 1685년 5월 병으로 체임되었다. 각면의 사창에 보민청(補民廳)을 설치하여 번거로운 부역을 없애고 호구미를 거두었다.
  • 진안현감. 1789년 10월에 부임하여 1791년 9월 장악원주부로 전임하였다.
  • 용담현령. 1740년 3월에 부임하여 1742년 8월에 이임하였다.
  • 용담현령. 1639년에 부임하여 1644년 임기만료로 체임되었다.
  • 용담현령. 1634년에 부임하여 1639년 임기만료로 체임. 객사를 건립하였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경숙(敬叔), 호는 송재(松齋). 문의공(文義公) 이언충(李彦冲)의 후예로 금부도사 이근인(李根仁)의 아들이다. 정숙공(貞肅公) 이탁(李鐸)이 재종형이다. 자품(資稟)이 높고 재기가 뛰어나 문의(文義)가 밝았으며 효성이 깊었다. 삼각산 기슭에 ‘송재(松齋)’라는 서실을 지어 시서(詩書)를 갖추고 매일 연구 생활을 계속하였다. 외물(外物)에 관심을 두지 않고 어떠한 시비에도 집착함이 없이 내면세계의 함양과 성찰에 공을 쌓았다. 도백(道伯)의 천거를 받아 참봉(參奉)을 제수 받았고, 임실현감(任實縣監)을 거쳐 나주판관(羅州判官)에 부임하여 절용(節用)·애민(愛民)·양사(養士)·숭덕(崇德)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 만년에는 양주(楊州)에 돌아와 강학(講學)으로 일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