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현감. 1695년 4월에 부임하여 1698년 4월에 사망하였다. 강직, 명료, 공정하여 향리와 백성들이 모두 감히 속이지 못했다.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죽으니 관과 읍인이 모두 추모하였다고 『鎭安誌』에 전한다.
  • 본명은 수증(守曾), 호는 연담(蓮潭). 운규(雲圭)는 별칭이다. 담양군(潭陽君)의 13대손으로 흥선군 이하응(李昰應)과 친밀하게 지냈다. 일찍이 문과로 참판(參判)의 벼슬을 한 적이 있으나 국운이 쇠약해짐을 느끼고 서울을 떠나 논산군 양촌면 모촌리의 일명 띠울마을에 은거하였다. 그의 학통은 이서구(李書九)의 뒤를 이어 천문·역산(曆算)·역학·시문에 능통하였고, 특히 사람을 판별하는 지인지감(知人之鑑)에 밝았다. 그래서 최제우(崔濟愚)와 김광화(金光華), 그리고 김항(金恒) 등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배웠다. 그러던 중 1861년에 최제우·김광화·김항을 차례로 불러, 최제우에게는 ‘선도(仙道)의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주문을 독송하며 심신을 연마하라”고 하였으며, 김광화에게는 ‘불교의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남문(南門) 열고 바라 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 밝아온다.”라는 주문을 주면서 수련을 하라고 하였다. 김항에게는 ‘유교의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관담(觀淡)은 막여수(莫如水)요, 호덕(好德)은 의행인(宜行仁)을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하니 권군심차진(勸君尋此眞)하소.”라는 시를 남겨주고, 표연히 띠울마을을 떠나 무주 용담(龍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은거하다가 다시 본 고향인 천안 목천(木川)으로 갔다고 하나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뒤 최제우는 동학을 일으켰고, 김광화는 남학(南學)을 창시하였으며, 김항은 19년 동안 ‘영동천심월’의 뜻을 알기 위하여 정진하다가 1879년 깨달음을 얻고 『정역 正易』의 체계를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따라서, 동학과 남학 그리고 『정역』은 모두 그의 사상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나 이 주장은 대개 김항의 계통에서 제시하고 있다. 세 제자 중 김항만이 그와 사돈관계를 맺은 것을 보아도 양자의 돈독한 유대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남학. 《참고문헌》 이정호 『정역(正易)연구』 (국제대학 인문사회과학연구소, 1976), 류남상 『정역사상(正易思想)의 연구』 한국종교 제1집(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 용담현령.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용담현령. 1863년 11월에 부임하여 1864년 재임중 사망하였다. 진천현령과 맞바꾸어 부임하였다.
  • 진안현감. 1567년 11월에 부임하여 1568년 7월에 이임하였다.
  • 1784~1870.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학자. 자는 순경(舜卿), 호는 석정(石亭). 증조는 이규성(李揆聖), 조부는 이구연(李龜蓮), 부친은 이수삼(李受森)이다. 재예가 뛰어났으며, 고종 대에 행의(行義)로 사림의 천거를 받았다. 정상범(鄭相範)이 전라도를 순행할 때 특제(特題)로 내린 “백리수풍망려필식(百里樹風望閭必式)” 여덟 자로 지은 글을 당시 사람들이 서로 전하며 암송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전라 병사(兵使) 이관연(李觀淵)이 수직(壽職)으로 천거하여 숭정대부 동지충추부사(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최병심(崔秉心)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 생몰년 미상. 『동국여지승람』 <진안현>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목사에 이르렀다’고 실려 있다. 《참고문헌》신증동국여지승람(관찬지리서, 1530)
  • 진안현감. 1559년 6월에 부임하여 1562년 6월에 이임하였다. “재임한지 200년이 지났으나 추모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진안지』에 전한다.
  • 1643~1695. 조선 중기 진안현감을 지낸 문신. 자는 대숙(大叔). 임영대군의 7대손이며 판서 이응시(李應蓍)의 아들이다. 조부와 부친의 공덕으로 음관(蔭官)에 천거되어 진안현감이 되어 1676년에 부임하였다. 1681년 9월에 암행어사로 내려온 오도일(吳道一)의 추천으로 양리(良吏)로 뽑혀 관직이 특승되었다. “향리[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평안했다”고 『진안지』에 전한다. 이어 남원부사로 전임하여서는 가뭄이 들면 농사를 못 짓는 오수방에 보를 막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 사람들이 감복하여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1689년 호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충홍도[현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다. 1691년 지방행정관으로서 행한 선정을 인정받아 호조참판으로 승직되었고 1692년에 공조판서, 1693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훈련대장이 되었다. 1693년 국방 대책으로 통진(通津)[현 경기도 김포시] 문수산(文殊山)에 성을 쌓았다. 1694년 지의금부사가 되어 옥사를 공정히 다루었으며 다시 훈련대장이 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보복적인 탄핵을 받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이듬해에 사사(賜死)되었다. 1908년 3월 누명이 벗겨져 복권되었다. 《참고문헌》 신종우의 인명사전(http://www.shinjongwoo.co.kr/), 『숙종실록(肅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진안현감. 1805년 7월에 부임하여 1810년 2월 동부령으로 전임하였다.
  • 용담현령. 1616년에 부임하여 1621년 임기만료. 재임중 과거에 붙었다. 관아를 건축하였다.
  • 진안현감 겸직이었다. 1646년 6월에 부임하여 1647년 6월에 이임하였다.
  • 진안현감. 1876년 9월에 부임하여 1879년 4월에 재임중 사망하였다.
  • 8대 진안군수. 1954. 4. 8 부임하여 1955. 5. 4까지 1년 1개월간 재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