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9~1696. 조선 중기 진안지역에 살던 문신·유학자.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 조부는 상주 목사를 지낸 임타(林㙐)이고 부친은 군수 임일유(林一儒)이다. 1665년 사마시에 장원하였고 1671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하였다. 1679년 정언 부수찬 교리를 역임하고, 1686년 이조정랑, 이조검상, 부제학, 대사헌,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94년에 대사간,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부제학으로 있을 때 병이 들어 약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 뒤 참판에까지 이르렀다. 이단상(李端相)·박세채(朴世采)의 문인으로 뜻이 크고 박식하였으며, 소성(小成)에 만족하지 않고 천인성명설(天人性命說)을 깊이 연구하였다. 경전과 역사서에 두루 정통하였고 제자백가의 글에도 밝았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뒤에 송시열·송준길에게도 수학하여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 이이(李珥)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는 찬성하고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에는 반대하였다. 저서로는 『창계집』 27권이 있다. 나주의 창계서원(滄溪書院)과 함평 수산사(水山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임영기(1882~1910.03.25.)는 진안군 일서면 시동( 西面 矢洞, 지금 성수면 구신리) 출신이 다. 그는 1908년 1월 30일에 이석용의 호남 의진에 가입하여, 3월 4일까지 장수, 임실 둥지에서 유격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음력 2월 6일 의병 15명과 함께 전북 장수군 방교리(防橋里)의 민가에 들어가 엽전 1관문(貫文)과 무명베 1필을 모집하였다. 같은 달 14일에는 의병 24명과 함께 전북 임실군 아산면(阿山面) 보구리(保龜里) 민가에서 견포(絹布) 2필을 거두는 등 군자금과 군수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09년 11월 22일 광주지방재판소(光州地方裁判所) 전주지부(全州支部)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10년 3월 25일 옥중 순국하였다. 201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13대 진안군수. 1960. 5. 24 부임하여 1960. 1. 21 까지 5개월간 재임하였다.
  • 용담현령. 1894년 6월에 부임하여 1897년에 이임하였다. 비석이 있다.
  • 용담현령. 1725년 8월에 부임하여 1726년 12월 파직되었다.
  • 5대 진안군수. 1950. 5. 6 부임하여 1950. 6. 25 까지 2개월간 재임하였다.
  • 1866~1908.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1907년 9월 이석용의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박갑쇠(朴甲釗)·곽자의(郭子儀)와 함께 창의동맹단(倡義同盟團)의 총지휘에 임명되었다. 특히 진안군 석전리와 장수군 배룡리의 전투에서 뚜렷한 전과를 거두었으며, 군율(軍律)이 엄정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삭왜십죄(數倭十罪)’를 지어 일본의 잘못을 10개 조항으로 조목조목 비판하기도 하였다. 1908년 일제의 강력한 토벌작전으로 이석용의 의병 부대가 해산되기 직전까지 격렬하게 항쟁하였으나 끝내 일본군과 격전 중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한편 이석용의 의병활동기록인 『정재선생 호남창의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에는 임종문이 참여한 의병 대열의 전투 장소와 일자 및 일진회원을 섬멸한 일, 왜인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한 전과 등이 기록되어 있다. 1968년에 대통령 표창,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정재선생 호남창의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 1860~1930. 자는 원일(元日), 호는 소림(小林). 조양군(兆陽君) 임세미(林世味)의 후손이다. 이도계(李道繼)가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용담현령. 1762년 7월에 부임하여 1764년 12월 상을 당하여 체임되었다.
  • 1대 진안군수. 1945. 12. 24 부임하여 1946. 7. 8 까지 7개월간 재임하였다.
  • 1690~1756.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학자. 호는 노암(老巖). 임타(林㙐)의 증손자이고 임만유(林晩儒)의 손자이다. 임윤(林潤)의 아들이며 임호진(林濠鎭)의 증조부이다. 상전면 용평리 평은마을에서 태어났다. 임타가 상전면 와은리에 내려와 은거하며 지은 만화정(萬花亭)이라는 정자에서 평생 학문과 시작(詩作)으로 살았다. 학문이 뛰어나 진안에서 일류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송성담(宋性潭, 이름은 煥基)도 임취업의 문집을 보고 “문장사율(文章詞律)은 임영(林泳)과 동등하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노암문집(老巖文集)』5권, 『효행유고(孝行遺稿』5권 등이 있다. 시는 「과만화정구지(過萬花亭舊地)」가 전한다. 《참고문헌》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 1593~1664. 조선 중기 진안지역에 거주한 문신. 자는 실지(實之), 호는 몽촌(夢村). 승지(承旨) 임붕(林鵬)의 증손으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임복(林復)의 손자이며 임협(林悏)의 아들이다. 임제(林悌)가 5촌 당숙이다. 어렸을 때에 권비(權鞞)에게 수학하였고 천성이 어질고 재주가 뛰어나서 호남 제일의 인물로 이름이 높았다. 1618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가 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금오랑 의금부도사(金吾郞義禁府都事)를 제수 받았다. 이후 태인 현감(泰仁縣監),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 칠곡 부사(漆谷府使), 서산 군수(瑞山郡守), 함흥 판관(咸興判官), 오위장(五衛將), 금산 현감(錦山縣監), 이천 부사(利川府使), 상주 목사(尙州牧使), 부호군(副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며, 목민관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임타는 벼슬에서 물러나 아들들과 더불어 정천면 조림촌에 우거하여 나주 임씨 용담 종중의 뿌리가 되었다.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http://people.aks.ac.kr/)
  • 용담현령. 1779년 1월에 부임하여 1781년 12월 금구현령으로 전임하였다. 공조정랑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
  • 1779~1847.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학자·교육자. 자는 찬증(燦增), 호는 모와(慕窩). 임제(林悌)의 7대손이고 아버지는 임기원(林起遠)이다. 정천면 조림리에서 태어났다. 이 지방이 심산유곡으로 교육기관이 없었음을 한탄하여 1824년 4월 교육에 뜻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흥학계(興學契)’를 조직하였다. 1836년 정천면 갈룡리에 ‘흥학당’이라는 서당을 세워 누구나 무료로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이후 10여 년 간 후진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아들 임철한(林澈漢)이 흥학계를 더욱 확장시켜 지방 발전에 많은 공을 세웠다. 《참고문헌》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 용담현령. 1806년 7월에 부임하여 1811년 7월 임기만료로 체임되었다. 영산현령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