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시대 용담 고씨 문인. 선계는 제주 고씨(濟州高氏)이며, 문헌(文獻)이 없어 자세한 세계(世系)나 본관(本貫) 등 유래는 알 수 없다. 진안군에 본관을 둔 용담 고씨의 시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용담편 인물에 ‘벼슬이 삼중대광(三中大匡)에 이르다.’고 실려 있고, 『여지도서(輿地圖書)
  • 자 춘서(春瑞), 호 소사(小史). 본관은 제주로 문영공(文英公) 용현(用賢)의 후예이며, 고기현(高箕鉉)의 아들이다. 효성이 뛰어났고 예조판서 김종한(金宗漢)이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고려 말엽에 왜구가 진포(鎭浦)에 쳐들어와 주군(州郡) (확실한 지명?)을 약탈하였다. 그 때 염군리(廉君利)와 더불어 현령 피원량(皮元亮)을 도와 현의 남쪽에 목책을 세웠다. 그리고 돌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여섯 곳에 돌을 쌓아 놓고 왜적이 쳐들어오면 돌을 내려뜨려 격퇴하고자 하였다. 적이 이쪽의 방비가 튼튼한 것을 보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가, 온 경내가 무사하였다 한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관찬지리서, 1530), 동국여지승람
  • 1864~1907. 대한이산묘에 배향된 개항기 독립운동가·의병. 전라남도 창평 출신. 자는 성필(聖弼), 호 인봉(麟峰). 통정대부 용양위 부호군 고휘진(高輝鎭)의 아들이다. 족손(族孫)인 고광순(高光洵)과 의병을 일으켜 부장(副將)으로 활약하다가 전사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무신. 『동국여지승람』 <용담현>편에 ‘벼슬이 판삼재(判三宰)에 이르다’라고 실려 있다. 원종과 충렬왕 때에 사신으로 원(元)을 내왕하면서 외교를 담당하였다. 특히, 1274년(원종 15) 장군으로 판각문사(判閣門事) 이신손(李信孫)과 함께 원에 신년하례 차 갔을 때, 원의 요구사항 가운데 권농사(勸農使) 파견에 관한 일만은 고려에 위임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밖에도 공주의 병 치료를 위한 의원의 요청, 고려왕의 친조(親朝) 정지, 신정하례 등을 위하여 여러 차례 원에 다녀왔다. 《참고문헌》신증동국여지승람(관찬지리서, 153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한말의 의병. 용담군 이동면[동향면] 하행원리 출신이다. 1908년 초 문태수가 지휘하는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덕유산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유격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909년 9월 동료의병 20명과 함께 검거되어 10월 8일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용담현령. 1566년에 부임하여 1568년 사망하였다.
  • 24대 진안군수. 1971. 8. 21 부임하여 1973. 6. 5까지 1년 10개월간 재임하였다.
  • 진안 현감을 지낸(1769~1771) 문신. 증조는 영조 때 경연관(經筵官)을 지낸 권상하(權尙夏)이다. 조부는 제주목사 권정성(權定性)이고 부친은 시강원(侍講院) 자의(諮議)를 지낸 권진응(權震應)이다. 정조 연간에는 배천(白川)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참고문헌》 김찬흡 『제주사 인명 사전』(제주문화원, 2002),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 김봉현 『제주도 유인전』(제주시 우당도서관, 2005)
  • 용담군수. 1900년에 부임하였으나 이임연대는 미상이다.
  • 1851~1908. 한말의 의병. 전라남도 장성 출신. 별명은 백마장군(白馬將軍),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齎).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1907년 9월 의병을 모집하고 호남창의맹소 대장에 추대되었다. 격문을 돌려 적에게 부역하는 자의 처단과 재산 몰수를 경고하였다. 9월 23일 고창 문수암(文殊庵)으로 진군하던 중 접근해 오는 적을 맞아 접전 끝에 큰 전과를 올렸다. 12월 광주의 관리 최상진(崔相鎭) 등의 협력으로 크게 세력을 떨치기도 했다. 12월 27일 의병대와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농성 중 적의 포위 공격을 받고 탈출하였으나, 구수동(九水洞) 민가에 은신하던 중 정월 초하룻날 붙잡혔다. 1908년 1월 2일 광주 서천교(西川橋) 아래 백사장에서 총살당하였다. 그 뒤 호남의진은 조경환(曺京煥) 등의 의병대에 편입되어 항일전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21대 진안군수. 1967. 12. 1 부임하여 1968. 10. 21까지 9개월간 재임하였다.
  • 용담현령.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1566~? 조선 중기의 문신.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의 하나. 자는 중허(仲虛), 호는 입택(笠澤). 고려 참정 금주군 김신(金侁)의 후예이며, 金成元(김聲遠)의 아들이다. 158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12년에는 알성문과에 급제하였다. 시강원 설서를 거쳐 1617년 성절사서장관(聖節使書壯官)으로 연경[북경]에 다녀왔으며, 경상 도사, 강원도 관찰어사, 평안도 진무어사, 강원도 안찰어사, 영호양도 도제독관(嶺湖兩道 都提督官)을 역임했다. 홍문관 교리(校理)로 있을 때 병자호란을 당하여 곡성창의사(谷城倡義使)로 500여 명의 의병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군해 갔다. 그러나 청주에 이르러 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왔다. 1639년에 이조참의가 내려졌으나 노병(老病)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1885~?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1908년 문태수의 의병대에 소속되어 고원중(高元仲)·원도숙(元道淑)·고명주(高明柱) 등 14명과 함께 군자금품을 모집하는 등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었다.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금고(禁錮) 3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진안지역 근현대 민족운동사 학술 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진안 향토문화 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3),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판결문[공훈 전자 사료관(http://e-gonghun.mpv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