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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1911년 3월에 부임하여 1913년 8월에 정읍군수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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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22년 3월에 부임하여 1724년 12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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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39년 7월에 부임하여 1842년 1월 순창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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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청여(1863.06.04.~1935.03.11.)용담군 일동면 양지리 출신 의병. 문태수(文泰洙) 의진에 가담하여 박춘실(朴春實) 선봉부대에 배속되었다. 장수군 계북면 문성동(文城洞) 뒤의 덕유산을 근거지로 하여 1909년 5월 김준대(金俊大), 고명주(高明柱), 고원중(高元仲), 신치수(辛致守), 안왈오(安曰五), 심우상(沈尤相), 원도숙(元道淑), 조경화(趙京化), 하준태(河俊太) 등 2백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장수·용담 등 부근 촌락에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문성(文城) 동북쪽의 산중에서 함양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다가 선봉장 박춘실이 부상하여 체포되고 의병 13명이 전사하자 부대가 궤산하는 참패를 당했다. 그 후 다시 호남의병단에 귀속하여 유격 활동을 하다가 1909년 9월 추석을 맞이하여 일시 해산하여 귀가하였는데 장수 주재소의 순사가 탐지하고 9월 21일에 검거되었다.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태형(笞刑) 100도를 받는 고초를 당했다.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7년 8월 15일에는 진안군 독립 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해 진안군지역독립유공자추모사업회가 건립한 독립유공자추모탑(→이산묘 건너편)에 명단이 올라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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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61년에 부임하여 1566년 백성이 병나면 힘써 구하고, 여러 공물창고를 잘 살피고, 재인악공의 복무연한을 10년으로 견감(蠲減)하였다. 임기만료로 체임된 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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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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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우천(于川). 최종응(崔鍾應)이 지은 우천기(于川記)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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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진안군수. 1988. 6. 11 부임하여 1989. 9. 1까지 1년 3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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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1918. 자는 능천(能千), 호는 수송(秀松).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후손이다. 궁내부(宮內府) 주정(主政)을 지냈으며 1907년에 사재로 ‘영육학교(英育學校)’를 세웠다. 박기양(朴箕陽)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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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학자. 자는 덕명(德明), 호는 동연(東淵), 김태현(金泰鉉)의 문인이다. 약관에 사서오경을 통달하고 일찍 문명(文名)을 얻었다. 1910년 국권상실 이후 두문불출하였으며, 순종의 서거 시에는 북쪽을 향하여 통곡재배하고 상복을 입은 채 팔도강산을 유랑하였다. 10여 년 간 음풍영월(吟風詠月)하면서 지은 그의 시문(詩文)은 도처에서 경탄과 절찬을 받았다. 저작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일부를 모아 1970년 『동연집』을 출판했으며, 1977년 8월 아들 허재득(許在得)과 허재숙(許在叔)이 친필 시문을 한글로 해석하고 사진판 인쇄로 중간(重刊)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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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현대 진안 출신의 학자. 자는 덕윤(德潤), 호는 송취(松翠). 안천면 안자동 출생. 조부와 부친에 이어 3대에 걸쳐 용담향교의 전교(典校)와 유도회장을 연임하였으며 1956년에 문묘를 중수하는 등 관리했다. 비록 가세는 빈한하였으나 전통적인 유가의 가풍을 이은 선비로서 유풍의 진작과 청빈의 정도로 일생을 다하였다. 그 부인 의성 정씨(義城丁氏)도 시부모 섬기기에 솔선수범하였다고 한다. 1961년 4월 진안의 사림(士林)이 진안군수 김윤철(金允喆)에게 천거하였으며, 군수 김윤철은 부인을 표창하고 다시 문교부장관에게 효행으로 천거하였다. 《참고문헌》 『원용담군지』(용담향교, 1973),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신종우의 인명사전(http://www.shinjongw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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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남파(南坡).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후손이며, 허술(許述)의 아들이다. 1946년에 정읍군수를 지냈고 전주지방과장을 역임하였으나, 관직을 버리고 고을의 남쪽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 허조헌(許肇憲)이 지은 남파서(南坡序)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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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1442. 자는 맹명(孟明), 호는 신암(愼菴). 시호는 공간(恭簡). 호부낭장(戶部郎將) 허강안(許康安)의 후손이며, 간숙공 허주(許周)의 아들이다. 1402년에 등과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고, 사간원 우정언(右正言)과 형(刑)·예(禮)·병(兵) 3조(曹)의 좌랑을 지냈다. 1431년에는 대사헌에 탁용되었고 형조참판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으며, 예조판서에 이어 이조판서로 옮겼다. 1440년에 예문관 대제학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친의 상을 당하였고, 얼마 후 사망하였다. 조정이 공간(恭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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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1923. 자는 덕연(德淵), 호는 농은(農隱).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후손이다. 이용직(李容稙)이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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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진홍(鎭洪), 호는 석담(石潭).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후손이다. 김윤동(金潤東)이 지은 석담기(石潭記)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