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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동학운동가. 고부 출신. 전봉준의 막료로 진안의 전익호·전화삼 등과 더불어 의거에 자진 참여하여 활약하다가 처형되었다. 봉기 이전에 백운면 오정리에 들어와 있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의 활동상은 자세하지 않다.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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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 조선 중기 진안 출신의 무신.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사탁(士卓), 호는 가재(佳齋). 고조는 전이충(全以忠), 증조는 전규(全奎), 조부는 증 좌승지 전수함(全守艦). 부친은 증 예조판서 전대승으로 정묘호란 때 순절하여 「호남절의록」에 기록되었다. 1624년 서울에 올라가 이정구(月沙李廷龜)·김상헌(淸陰金尙憲) 등에 사사하였다. 그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로 파천할 때 15세의 나이로 지원병이 되어 어가를 따랐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부친 전대승(全大昇)이 평양에서 순절하자 그는 복수를 맹세하고 전장을 향했다. 그러나 청(淸)과 화의(和議)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한 마음으로 시신을 수습하여 귀향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지키면서 성 밖에 출전하여 많은 적을 섬멸하였다. 얼마 후 주화(主和)·척화(斥和)의 논쟁을 보고 그는 “화의는 불가하다”고 상소하였다. 1637년 ‘삼전도의 항복’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갈 때 세자의 배종무관으로 청(淸)에까지 따라갔다. 전동흘은 그 기회에 청의 국방태세·군사배치 등을 낱낱이 조사하여 군사상 전략을 세우는 데 기여하였다. 귀국 후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하고 낙향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에 또 다시 창의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장사랑(將仕郞)으로 등재되자 바로 선전관을 거쳐 흥덕 현감이 되었다. 1650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후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송시열이 전동흘·이상진·소두산 세 사람을 동시에 추천하면서 ‘호남삼걸’이라 불렀다. 1651년 무과에 급제, 용맹을 인정받아 북벌(北伐)정책을 추진하던 효종에 의하여 발탁되었다. 강원병사, 충청병사, 황해병사, 경상좌수사 등 4수사(水使)·7병사를 역임한 후 통제사(統制使)를 역임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여러 차례 좌우포장(左右捕將)을 겸하여 치안유지에 큰 공을 세웠다.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관에 임명되었다. 철산부사로 재임 중 “억울하게 죽은 장화(薔花)와 홍련(紅蓮)의 원한을 풀어 주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참고문헌》 『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가재 전동흘 신도비’(최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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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문신. 자는 문영(文英), 호는 도은(都隱). 시호는 문평(文平). 백제 10대 공신 환성군 섭(歡城君聶)의 후예로서 증조는 판공부사(判公部事) 영평군(永平君) 전단(全旦), 조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전려(全呂), 부친은 좌복야(左僕射) 전희(全熙)이다. 모두 고려 때 벼슬한 사람이다. 1367년에 성균관을 창설하여 정몽주(鄭夢周)를 국자 좨주(國子祭酒)로 삼았고, 경술(經術)이 뛰어난 선비를 뽑아 매일 명륜당에서 경의(經義)를 강론하였다. 137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에 제수되었고 후에는 대사간을 역임한다. 1375년에 김의(金義)가 명(明)의 사신을 살해하고 북원(北元)으로 도망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1386년에 풀려나 평안백(平安伯)이 되었다. 정몽주와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공으로 형부상서사(刑部尙書事)에 올랐다가 정당문학을 지냈다. 1392년 김주(金澍)와 함께 명에 사신으로 갔다가 환국하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이성계가 세 차례나 조정으로 나오라고 하였지만 모두 거절하였으며, 전국을 유랑하다가 마침내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江亭里)에 은거하였다. 전문식의 후손들이 진안에 세거(世居)하게 된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1400년에 정종의 간곡한 청으로 잠시 경상백(慶尙伯)을 지내게 되는데 이때 선정(善政)을 베풀었다는 평을 받았다. 만년에 치사(致仕)한 후로는 전국의 산수를 두루 유람하며 생을 보냈다. 세종 때 좌찬성 대제학(左贊成大提學)에 증직되었으며 문평(文平)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문식의 위패는 대한이산묘 영모사(永慕祠)와 마령면 강정리 영산사(靈山祠)에 배향되어 있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2009),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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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면 갈현리 원갈현에서 태어났다. 조선말 가뭄과 풍수해로 흉년이 들어 모든 사람들이 굶주리는 등 어렵던 시기에 ‘인색한 부자’로 알려진 전병현이 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어 아사의 위기를 모면하게 하였다. 이에 주민들이 마을 앞에 선덕비를 세워 그의 덕을 기렸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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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91. 좌도굿 장구기능 보유자. 마령면 연장리(延章里)에서 출생. 부(父)는 전낙현(全樂玄)이다. 어려서부터 장구의 매력에 끌려 마을굿판에 뛰어들었으며, 24세 때 본격적으로 용담(龍潭)의 최상근 문하에서 익혔다. 1949년 전국농악경연대회 전북대표단 수장구로 선발되어 출전, 이 대회에서 전북대표단이 1위를 차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전국대회’ 이후 부산·순천·전북 일원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일찍이 장구에 전념했던 맏형의 영향을 받아 형제가 모두 장구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동생 삼봉(三奉)과 수봉(洙奉)은 오히려 맏형을 능가한다는 평이 중론이다. 그의 특기는 영산굿이다. 훤칠한 몸맵시와 유연한 동작, 날렵한 손놀림, 능수능란한 연기력을 겸비한 그는 전라도 좌도굿 장구의 진수를 보여주는 기능보유자였다. 후진양성에도 열성적이어서 1980년 이후 충남 금산농고 초청으로 농악대 지도, 1986년과 1987년에는 경기도 용인군 민속촌에서 학생 및 일반인 농악을 지도하였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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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안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자는 경언(敬彦).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손으로 전영탁(全永鐸)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옳지 못한 일을 보고 그냥 넘기지 않았고 용기와 지략도 매우 뛰어났다. 진안에서는 1919년 3월 25일 진안읍 장날을 기해 수 백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고, 4월 3일에는 주천면, 4월 6일에는 마령면, 4월 12일에는 성수면, 4월 13일에는 다시 마령면 등에서 만세운동이 계속 이어졌다. 전성권도 사람들을 규합해 만세를 부르짖었는데 그 위엄에 감히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본인들 또한 위세에 눌려 따라 만세를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일본 헌병대에 잡혀 수년을 복역하였다. 《참고문헌》 『진안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 鎭安郡史(진안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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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출신으로 전해지는 개항기 의병. 이석용(李錫庸)의 의병대에 가담하였다. 1907년 이석용이 지은 ‘격중가(檄衆歌)’(←)를 듣고 호남의병창의동맹단에 가입하여 김사범(金士範)·윤명선(尹明善)과 함께 후군장(後軍將)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활동한 것은 분명하나 기록이 없어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의 금석문』(진안문화원, 2001),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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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은재. 본관은 천안으로써 문평공 문식의 후손이며 월암 규의아들이다. 부친이 적에게 죽음 당한 것을 애통해 하다가 정유년에 의거하여 충무공 이순신을 따라 노량에서 순절하였다. 숙종조에 예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사적이 절의록에 실렸다.
號隱齋 貫天安 文平文軾后 浪庵奎子 痛父死于敵 丁酉擧義 從忠武公李舜 臣 殉節露梁 肅宗朝贈禮判 事載節義錄
진안향교지2009, 증보판 진안향교지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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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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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지사. 호는 진명(眞明), 진안읍 군상리 중앙동에서 태어났다. 진안군 부군수급의 직위로 근무하던 중 경술국치의 낌새가 보이자 이를 반대하고 진안 우화산의 의병들과 물질적·정신적으로 비밀리에 협조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해 당산(堂山: 진안읍 군하리 소재) 근처의 나무에 매달린 채 불에 타 죽음을 당하였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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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1958. 일제강점기 진안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만세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자는 보익(補益), 호는 운암(雲巖). 전대현(全大鉉)의 아들이다. 마령면 계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6일에 마령면 평지리 뒷산에서 오기열(吳基烈)·김구영(金龜泳)·황해수(黃海水)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인근 주민 수백 명이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올렸으나 출동한 헌병의 제지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튿날에도 만세 운동을 벌였고, 특히 4월 13일에는 마령 장날을 맞아 마령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전영상은 담력이 대단하여 일본 경찰도 그 앞에서는 벌벌 떨었으며, 일본 경찰에게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도록 윽박질렀다고 한다. 일본 경찰도 온 몸을 떨면서 만세를 부르고서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뒤 붙잡혀 갇혔는데 벽을 무너뜨리고 탈출하였다. 하지만 또 붙잡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95년 마령면 계서리 오동마을 어귀에 ‘전영상 선생 항일 독립운동 기적비(全永祥先生抗日獨立運動紀蹟碑)’가 서 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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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957. 자는 덕표(德表), 호는 송암(松菴).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손이다. 정귀영(鄭貴泳)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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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1928. 자는 국명(國明), 호는 호은(湖隱).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손이다. 이도복(李道復)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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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화순(和順), 호는 청계(淸溪). 벼슬은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대호군 전극례(全克禮)의 후손이다. 김종한(金宗漢)이 찬한 효행비명이 있다. 아들 전진권(全振權) 또한 효성이 뛰어났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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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위은(渭隱).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손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영조조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좌승지가 내렸다. 김상두(金相斗)가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