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담군 이동면 유곡리 출신 한말의 의병. 1908년 초 문태수가 지휘하는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덕유산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유격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909년 9월 동료의병 20명과 함께 검거되어 10월 8일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참고문헌] 전북의병사 하, 한말 전북의병사
  • 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동국여지승람』 <용담현>편에 실려 있는 인물. 고려 말엽에 왜구(倭寇)가 진포(鎭浦)에 쳐들어와 주군(州郡)을 약탈하였다. 그 때 고윤덕(高允德)과 함께 현령 피원량(皮元亮)을 도와 현의 남쪽에 목책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돌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여섯 곳에 돌을 쌓아 놓고 왜적이 쳐들어오면 돌을 내려뜨려 격퇴하는 전략을 세웠다. 적이 이쪽의 방비가 튼튼한 것을 엿보고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가, 온 경내가 무사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신증동국여지승람(관찬지리서, 1530)
  • 용담군수. 1900년 이후 부임하였으나 부임연대와 이임연대는 미상이다.
  • 1888.3.09~1950.09.28. 애국지사, 제헌의원. 자는 낙중(洛中), 호는 둔암, 마령면 평지리에서 출생. 이조판서를 지낸 오팽숙(吳彭淑)의 후손이다. 1907년에는 이석용(李錫庸)의 호남의병창의동맹단에 참가하여 조영국·김학문과 함께 식량운반의 책임을 맡았고, 1919년 4월 6일 전영상(全永祥)·김구영(金龜永)·황해수(黃海水) 등과 함께 마령면 평지리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황해수가 붙잡혀 감으로써 해산하였다. 전영상·김구영 등과 함께 4월 13일 다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전영상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혀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당하였다. 포상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훈장, 독립유공건국훈장 애족장이 있다. 부인 박찬순(朴燦順)과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 1827~1906. 자는 운서(雲瑞), 호는 옥은(玉隱). 이조판서 오팽숙(吳彭淑)의 후손이며, 증 교관 오성복(吳成福)의 아들이다. 진사를 지냈다. 송래희(宋來熙)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기정진(奇正鎭)과 교유하였다. 김종한(金宗漢)이 찬하고 윤용구(尹用求)가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용담현령. 1728년 4월에 부임하여 1730년 6월 파직되었다.
  • 1547~1593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영보(榮甫), 호는 성산(聖山). 이조판서 오팽숙(오膨叔)의 증손이며, 오사운(吳思雲)의 아들이다. 15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홍문관 정자로 등용되어 국가문서를 맡아서 처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하기보다 직접 적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휘하로 들어가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싸움에서 아군이 패하자 이듬해 의병장 고종후(高從厚)와 함께 다시 의병을 모아 진주성으로 달려갔다. 그 해 8월, 총병력으로 공격해 오는 왜군과 처절한 혈전을 벌이다가 끝내 성이 무너지려 하자 판결사 김천일(金千鎰), 동료 고종후와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뒤에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1853~1915자는 도형(道亨), 호는 묵재(黙齋). 이조판서 오팽숙(吳彭淑)의 후손이다. 서광필(徐光弼)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용담현령. 1696년 7월에 부임하여 1698년 6월 어사가 장계를 올려 파직되었다.
  • 1805~1870자는 성오(聖五), 호는 만오재(晩悟齋). 동몽교관 오성복(吳成福)의 동생이다. 오도한(吳道漢)과 함께 송래희(宋來熙)의 문하에서 사사(師事)하였고, 임희진(林喜鎭)과 교유하였다. 김종한(金宗漢)이 찬하고 서광필(徐光弼)이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성술(聖述), 호는 죽파(竹坡). 을사늑약 이후 이석용, 김준, 전기홍 등의 의병단에 들어가 영광 불갑산 선치(蟬峙)와 나주 석문산 대명동, 광주 대치, 순창 내동, 함평 고막원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사로잡혀 대구 옥중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 진안현감. 1585년 10월에 부임하여 1599년 6월에 이임하였다.
  • 용담현령. 1630년에 부임하여 1634년 부친 병환으로 사직. 향교를 용두동으로 이설하였다.
  • 용담현령. 1892년에 부임하여 1894년 6월에 이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