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6~1911. 자는 덕서(德瑞).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손이다. 부친은 전재환(全載煥)으로 성효가 지극하여 삼강록(三綱錄)에 실려 있다. 수직으로 통정대부가 내렸다. 손자 전경근(全景根)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909~1960. 원불교종교가. 본명은 세권(世權). 법호는 혜산(惠山). 법훈은 대봉도. 불법연구회 연구부장, 교무부장, 서무부장, 서정원장,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전음광은 1909년 6월 17일 마령면 평지리에서 부친 영규(永奎)와 모친 전삼삼(田參參)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일찍이 한문공부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1세 되던 해 16세인 권동화(東陀圓權動華)와 결혼했다. 전음광이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朴重彬)를 처음 만난 것은 1923년(원기8) 1월 모친을 따라 진안 만덕산에 갔을 때였다. 그 후 전주로 이사하여 전주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두 번째로 소태산을 만나게 되었다. 이후 원불교에 입교한 전음광은 소태산을 시봉하며 익산총부 건설에 정성을 다해 조력했다. 모친의 소태산에 대한 신심은 마령에서 전주로, 전주에서 다시 익산총부로 이사하기에 이르렀다. 모친은 소태산의 식사를 전담했고 전음광은 회화ㆍ강연ㆍ상시일기ㆍ감각감상ㆍ심신작용처리건을 소태산에게서 직접 지도받았다. 1926년(원기11) 서무부서기로 임명되어 교무사무를 아울러 5년간 근무했다. 그리고 ‘청년단’을 만들어 일반 청년들의 체육ㆍ음악 등 연예지도를 담당했다. 이후 원불교의 교중 출판사업으로 《월말통신》,《회보》등의 발행을 주도하는가 하면 일정(日政)말기 교단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전음광은 익산군이나 일본 경찰과 접촉하여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였다. 전음광은 광복 이후 교직을 놓고 휴양하다가 1960년(원기45) 7월 21일 52세를 일기로 열반했으며, 장녀 팔근이 원불교에 전무출신했다.《참고문헌》 『원불교사전』
  •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성원(聲遠), 호는 용재(庸齋).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예로 성균생원(成均生員) 전열(全烈)의 아들이다. 1636년 병자호란에 남한산성이 청군(淸軍)에게 포위되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종형 전응철(←全應喆), 정동협(←鄭東俠), 신성식(←辛成式) 등과 의병을 모으고 가재(家財)를 팔아 군량(軍糧) 수백 석을 마련하여 과천(果川)에 이르렀으나 이미 조선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한탄하며 눈물을 머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중기 의병. 자는 백언(伯言), 호는 우재(愚齋).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예로서 전계종(全繼宗)의 손자이다. 병자호란 때 서울을 지키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여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응철은 이흥발(李興渤), 이기발(李起渤), 최온(崔縕), 양만용(梁曼容), 유즙(柳楫) 등이 함께 내놓은 격문을 보고 분발하여 의병에 참가하였다. 사촌 동생 전응종(全應鍾), 정동협(鄭東俠), 신성식(辛成式) 등과 함께 각지의 의병과 가동 수백 명을 이끌고 경기도 과천(果川)까지 진군하였으나, 이미 조선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천거되었다. 자세한 사적은 『창의록(倡義錄)』에 적혀 있다. 《참고문헌》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
  • 1845~1897. 한말의 동학운동가. 자(字)는 내삼(乃三). 아버지는 통정대부 전기풍(全基豊)이다. 백운면 오정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학문을 익혀 주위에서 ‘전학자(全學者)’로 불렀으며, 동학농민 운동 이전부터 오정리에서 전봉준과 자주 만나 도와주었고 직속 부관으로 거사에 참여하였다. 전봉준이 체포된 후 부귀면 오룡리로 은신하였으나 1897년 일본군에 붙들려 사지가 토막 나는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감시 때문에 가족들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야밤에 시체를 수습하여 부귀면 봉암리 미실마을 부근 야산에 묻었다 하나, 아직까지 묘를 찾지 못하고 실전(失傳)되었다고 한다. 태반(泰般)·태욱(泰郁)의 두 아들이 있다.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 1666~?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학자. 자는 봉경(鳳卿).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성균생원 전열(全烈), 조부는 사헌부감찰 전응정(全應禎)이며 처사 전시진(全時進)의 아들이다. 마령면 오동리에서 태어났다. 168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숙종의 앞에 나가 연화전(延和殿)에서 ‘봉남비(鳳南飛)’의 글귀를 외우니, 숙종이 ‘봉비구(鳳飛句)’로 화답하고 특별히 법온(法醞)[궁중에서 담근 술]을 하사하였다. 당시 학문과 절의가 진안지역에서 가장 뛰어났다 한다. 1709년에는 사림들과 힘을 합하여 영계서원(靈溪書院, →영계사)을 창건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도복(李道復)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1890~1968. 근현대 진안 출신의 효자. 호는 송파(松波). 호조판서 전극례(全克禮)의 16대손이다. 마령면 오동리에서 태어났다. 이병연(李柄淵)·정종엽(鄭鍾燁)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학문을 갈고 닦아 제자가 많았다. 항일의병 전기홍(全基泓)·이석용(李錫庸)과도 뜻을 같이하여 가산(家産)을 털어 거사 자금을 대는 등 숨은 애국지사였다. 왜경의 횡포를 배격하는 데 앞장섰으며, 진안향교의 임원이 되어 ‘여씨향약’을 시행하고 공민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 등 진안지방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산정사를 세워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이로 인해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 등이 글을 보내 칭송하기도 하였다. 전국의 유림들이 기금을 모아 백운면 평장리 가전마을 체게산 기슭에 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진안의 맥』(진안군, 1982),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 ?~1457.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호는 죽헌(竹軒).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현손으로 호조판서 전극례(全克禮)의 아들이다. 타고난 바탕이 빼어나고 뜻과 기개가 높았다. 세종 때에 형인 사간(司諫) 전자온(全自溫)과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직(司直)에 이르렀다. 청현(淸顯)을 드러냄에 거리낌이 없고 바른 말을 잘하여 세조의 미움을 받았다. 상왕인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형 전자온과 함께 영월 청령포에서 순절하고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도 그 뒤를 따랐다. 그 후 유림이 성수면 도통리에 쌍충단(雙忠壇)을 지어 봉향하고 영산서원에 배향하였으며 대한이산묘에 추향하였다. 이런 사적이
  • ?~1457. 조선 전기 진안 지역의 충신. 호는 송당(松堂). 십제공신(十濟功臣) 환성군(歡城君) 전섭(全攝)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대사헌 전천근(全天近), 조부는 동지중추 전사미(全思美)이고 대호군(大護軍) 전극례(全克禮)의 아들이다. 마령면 강정리에서 태어났다. “1444년 동생 전자양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전해오지만 『문과방목』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던 때 형제가 이의 부당함을 말하다가 세조의 미움을 받아 외직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1457년에 단종이 영월에서 서거하자 이들 형제는 서강(西江) 청령포(淸泠浦)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으며 부인 안씨도 뒤따라 자결하였다. 전자온과 숙부인 순홍 안씨, 아우 전자양과 그 부인 평산 신씨가 각각 합장되어 있는 묘소를 쌍충단(雙忠壇)이라고 한다. 대한이산묘 영모사와 영산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1798~1845.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학자. 자는 정서(丁瑞), 호는 만보재(晩保齋). 전계종(全繼宗)의 9세손으로 증조부는 전세휘(全世輝), 조부는 전상문(全尙文), 부친은 전기풍(全基豊)이다. 마령면 월운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송래희(宋來熙)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문예에 뛰어났다. 진안에서 오도한(吳道漢)·장한규(張漢奎)·이재승(李材升) 등을 가르쳐 소과에 합격하게 하였다. 이도복(李道復)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32~1909. 자는 윤집(允集), 호는 이암(駬菴). 전계종(全繼宗)의 후손이고, 통정대부 전광진(全光震)의 아들이다. 효성으로 천거되어 비서승(秘書承)에 제수되었다. 이도복(李道復)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46~1910. 자는 여회(汝恢), 호는 은계(隱溪). 대호군(大護軍) 전극례(全克禮)의 후손이며, 참봉(參奉) 전병혁(全秉赫)의 아들이다. 정종엽(鄭鍾燁)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자는 자순(自純), 호는 국사(菊史). 대호군 전극례(全克禮)의 후손으로 증 숭정대부(崇政大夫) 전응호(全膺鎬)의 아들이다. 일찍이 송내희(宋來熙)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식이 매우 높았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포수(砲手) 100명을 모집하는 등 군대를 정비하였다. 음력 11월 7일에 정족산성을 공략하던 프랑스군을 매복 중이던 천총(千摠) 양헌수가 포수 500명을 이끌고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이석(李亻奭)이 찬한 묘갈문이 있다. 홍문관 대제학의 증직(贈職)이 내렸는데 『오륜록(五倫錄)』에 실려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전기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