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4∼1444. 조선 전기 진안으로 이거한 공주 이씨 중시조. 호는 사봉(沙峯). 시호는 공숙공(恭肅公). 농공판서(農工判書) 이엽(李曄)의 아들이다. 1393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1415년에는 좌부대언을 역임하고, 1418년에는 지신사(知申事)를 지냈다. 세종 대에는 이조참판, 병조참판, 강원도관찰사,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인순부윤(仁順府尹)을 지냈으며, 1443년 70세가 되어 퇴직하였으나 다시 판중추원사에 올랐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선위할 때 중신들의 반대를 무마하였고, 나라에 흉년이 들자 세종에게 건의하여 양곡을 대여하게 하였으며, 대마도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효행이 뛰어나 태종이 음식을 하사하여 노모를 봉양케 하였다. 이신지가 사망하자 세종은 부의와 제문을 보내어 애도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 용담현령. 1599년에 부임하여 1608년 파직되었다.
  • 진안현감. 1717년 12월에 부임하여 1721년 2월에 이임하였다.
  •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의 한 분. 자는 화옥(華玉), 호는 적양진일(赤陽眞逸) 또는 채헌(債軒).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의 후예로 이윤성(李胤星)의 아들이다. 3살 때 육갑(六甲)을, 8살 때 소학(小學)을 배웠다. 학업이 일취월장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두루 익히고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했는데, 특히 서경(書經)의 구주지문(九疇之文)과 주역(周易)의 팔괘(八卦)에 정통하였다.《참고문헌》 『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 ?~1915. 자는 윤명(允明), 호는 청계(淸溪). 판서 이귀산(李貴山)의 후손이다. 효성이 지극하였다. 벼슬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이르렀다. 이도복(李道復)이 찬한 묘표가 있다. 문집으로는 이도계(李道繼)가 서(序)를 쓴 청계유집(淸溪遺集)이 전한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용담현령. 1621년에 부임하여 1623년 파직되었다.
  • 이옥동(1922.06.01.~2009.02.18.) 전라북도 진안읍 연장리 172 출신 애국지사, 1941년 4월 일본(日本) 동경(東京)의 중앙대학(中央大學)에 재학하고 있을 당시 비밀결사인 계미회(癸未會) 동경한국유학생 친목독서회(東京韓國留學生親睦讀書會)에 가입하여 민족정신 앙양 및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42년 2월 17일 일경에게 붙잡혀 동월 22일 고향인 전주(全州)로 이송되어 전주형무소에 1년 4월동안 구금되고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3년 6월 전주형무소에서 출옥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청년강제지원병(韓國靑年强制志願兵) 반대를 위하여 친화회(親和會)를 조직하고 재동경학병징발 반대투쟁위원장(在東京學兵徵發反對鬪爭委員長)이 되어 당시 최남선(崔南善)·이광수(李光洙)·김승수(金承洙) 등이 한국인 학병의 일본군 입대를 권유하는 강연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20일간 구금되었다고 한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1923. 3. 30 부임하여 1924. 12. 24 체임되었다.
  • 용담현령. 1899년에 부임하여 1900년 진위현령으로 전임하였다.
  • 진안현감. 1695년 4월에 부임하여 1698년 4월에 사망하였다. 강직, 명료, 공정하여 향리와 백성들이 모두 감히 속이지 못했다.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죽으니 관과 읍인이 모두 추모하였다고 『鎭安誌』에 전한다.
  • 본명은 수증(守曾), 호는 연담(蓮潭). 운규(雲圭)는 별칭이다. 담양군(潭陽君)의 13대손으로 흥선군 이하응(李昰應)과 친밀하게 지냈다. 일찍이 문과로 참판(參判)의 벼슬을 한 적이 있으나 국운이 쇠약해짐을 느끼고 서울을 떠나 논산군 양촌면 모촌리의 일명 띠울마을에 은거하였다. 그의 학통은 이서구(李書九)의 뒤를 이어 천문·역산(曆算)·역학·시문에 능통하였고, 특히 사람을 판별하는 지인지감(知人之鑑)에 밝았다. 그래서 최제우(崔濟愚)와 김광화(金光華), 그리고 김항(金恒) 등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배웠다. 그러던 중 1861년에 최제우·김광화·김항을 차례로 불러, 최제우에게는 ‘선도(仙道)의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주문을 독송하며 심신을 연마하라”고 하였으며, 김광화에게는 ‘불교의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남문(南門) 열고 바라 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 밝아온다.”라는 주문을 주면서 수련을 하라고 하였다. 김항에게는 ‘유교의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관담(觀淡)은 막여수(莫如水)요, 호덕(好德)은 의행인(宜行仁)을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하니 권군심차진(勸君尋此眞)하소.”라는 시를 남겨주고, 표연히 띠울마을을 떠나 무주 용담(龍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은거하다가 다시 본 고향인 천안 목천(木川)으로 갔다고 하나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뒤 최제우는 동학을 일으켰고, 김광화는 남학(南學)을 창시하였으며, 김항은 19년 동안 ‘영동천심월’의 뜻을 알기 위하여 정진하다가 1879년 깨달음을 얻고 『정역 正易』의 체계를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따라서, 동학과 남학 그리고 『정역』은 모두 그의 사상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나 이 주장은 대개 김항의 계통에서 제시하고 있다. 세 제자 중 김항만이 그와 사돈관계를 맺은 것을 보아도 양자의 돈독한 유대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남학. 《참고문헌》 이정호 『정역(正易)연구』 (국제대학 인문사회과학연구소, 1976), 류남상 『정역사상(正易思想)의 연구』 한국종교 제1집(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 용담현령.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용담현령. 1863년 11월에 부임하여 1864년 재임중 사망하였다. 진천현령과 맞바꾸어 부임하였다.
  • 진안현감. 1567년 11월에 부임하여 1568년 7월에 이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