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현감. 1897년 6월에 부임하여 1898년 3월에 이임하였다.
  • 용담현령. 1837년 12월에 부임하여 1840년 12월 교하현령으로 전임하였다.
  • 진안현감. 1818년 8월에 부임하여 1819년 8월에 이임하였다.
  • 진안현감. 1750년 5월에 부임하여 1754년 8월 옥천으로 전임하였다.
  • 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1913년 8월에 부임하여 1914년에 이임하였다.
  • 용담현령. 1848년 4월에 부임하여 1852년 12월에 이임하였다.
  • 진안현감. 1728년 8월에 부임하여 1733년 4월에 이임하였다.
  • 용담현령. 1573년에 부임하여 1578년 임기만료로 체임된 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 용담현령. 1822년 6월에 부임하여 1825년 12월 한산현령으로 전임하였다.
  • 생몰연대 미상. 임진왜란 당시 전공을 세운 무신이다. 영의정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황수신(黃守身)의 후예로 문장이나 문필이 대성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왜적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의병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마침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朴進)이 경주성에서 왜적에게 기습을 받아 함락되는 것을 보고 의병을 일으켰다. 경주부윤 박이장(朴而章)과 힘을 합해 박진을 도와 왜적을 대파하고 성을 탈환하는 큰 공을 세웠다. 조정에서 그에게 절충장군 부호군 병마절도사의 벼슬을 내렸다. 상전면 구룡리 세동마을 앞산에 그의 묘가 있는데, 인근 주민들은 이 산을 황정산이라 부르고 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 안천면 백화리 출생.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의병 수백 명을 이끌고 각지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황간에서 사로잡혀 왜(倭)로 압송되었다. 그의 충의에 감복한 왜인 옥리의 주선으로 환국하였다. 부인 옥천 육씨는 남편이 출정한 사이 비(婢) 천분(千分)과 함께 산속으로 피난 중 왜병에 붙들리자 둘이 함께 자결하였다. 황대성은 환국 이후 부인이 순절한 것을 알고 뒤따라 자결했다. 후에 조정에서 통정(通政)을 추증하고 부인에게는 정려를 내렸다. 정려는 안천면 백화리 중배실 어귀 화산서원 앞 도로변에 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선조실록』
  • 1848~1913. 자는 진서(眞瑞), 호는 우정(藕汀). 영의정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동중추(同中樞) 황두일(黃斗一)의 아들이다. 선공감역(繕工監役)과 흡곡현령(歙谷縣令)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환벽정(環碧亭)을 지어 만년을 보냈다. 이용직(李容稙)이 찬한 묘갈문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13~1896. 자는 치화(致化), 본관은 장수. 방촌(厖村) 희(喜)의 후손이며, 증호조참판 승언(昇彦)의 아들이다. 1884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의 수직이 내려졌다. 이용직(李容稙)이 찬한 묘갈문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진안현감. 1700년 9월에 부임하여 1700년 10월에 이임하였다.
  • 1876~1905. 호는 송재(松齋).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황동규(黃東奎)의 아들이다. 품성이 순하고 후덕하였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에 우애하고 배우기를 좋아 했다. 1905년에 정려가 내려졌고, 교관에 추증되었다. 김영한(金甯漢)이 지은 정려기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