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현감. 1705년 10월에 부임하여 1707년 2월 시강원문학으로 전임하였다.
  • 34대 진안군수. 1984. 11. 1 부임하여 1987. 3. 10까지 2년 3개월간 재임하였다.
  • 1847~1916. 자는 경원(敬元), 호는 만회(晩悔). 백인걸(白仁傑)의 후손이며, 효행으로 포장을 받은 백치수(白致洙)의 아들이다. 벼슬은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에 이르렀다. 묘갈명은 윤영구(尹寧求)가 찬하고,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윤용구(尹用求)가 글씨를 썼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96~1936. 전라북도 정읍 출신의 독립 운동가.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호는 구파(鷗波).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가 동지를 규합하여 일제와의 무장항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주중(駐中) 일본 대사가 상해 훙커우(虹口)의 일본식 요정에서 일본 정객·참모부원, 친일 중국 정객과 군인 백여 명을 초대하여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과 함께 습격하려다가 잡혔다. 일본 나가사키 법원(長崎法院)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백학수(1872~?) 용담군 이남면(二南面) 비단리(鼻丹里) (현 상전면 구룡리 금당) 출신 의병, 1908년 경남 안의군(安義郡, 현 함양군) 황산면(黃山面)에서 문태수의진(文泰洙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8년 2월 15일 의병 수 명과 함께 안의군 황산면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9년 6월 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강도죄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