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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28년 3월에 부임하여 1629년 3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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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08년 3월에 부임하여 1508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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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88년 12월에 부임하여 1689년 2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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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07년 3월에 부임하여 1608년 1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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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62년 1월에 부임하여 1862년 4월 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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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83년에 부임하여 1884년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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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1966. 자는 경빈(敬彬), 호는 회강(晦岡). 송보산(宋寶山)의 후손이며, 송희렴(宋希濂)의 손자이다. 정귀영(鄭龜泳)이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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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 일제강점기 진안 출신의 교육인. 마령초등학교의 설립에 공헌하였다. 자는 계명(繼明), 호는 송산(松山). 마령면에서 태어났다. 전주와 서울에서 신학문을 배운 뒤 1920년 마령면 사곡리에 있는 서당을 신교육의 전당으로 바꾸고 사립 보통학교 인가를 받아 수업하였다. 1922년 다시 공립학교로 인가를 받아 토지 710평을 학교 대지로 희사하고, 5,000원의 희사금을 받아 현 마령초등학교의 위치에 교사(校舍) 2동을 신축하여 마령면·백운면·성수면·부귀면 등 지역의 신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참고문헌》 『진안의 맥』(진안군, 1982),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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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88년 3월에 부임하여 1688년 9월 부친의 병으로 의원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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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기록이 멸실되어 구체적 재임연대는 미상이나 192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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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82년 1월에 부임하여 1783년 3월 영산현감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 부친의 병환으로 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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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10년 4월에 부임하여 1711년 10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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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길 송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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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51. 근현대 애국지사. 자는 윤직(允直), 호는 경헌(敬軒). 주천면 신양리 출생. 이덕응(李德應)의 문인. 1919년 화동학교(현 주천초등학교)에 다니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1923년 3월 1일 3·1운동을 회상하며 제천봉에 단을 만들고 봄·가을 두 차례 향화를 올려 독립정신과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 그 후 이덕응의 뒤를 이어 20여 년 동안 후진교육에 헌신하였다. 이덕응의 기일에 꼭 참석하는 등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남달랐다. 한편, 금산에 은거하고 있던 의병장 이송(李松)과 긴밀히 연락하며 교분을 가졌으며, 향리에서의 교우관계도 구국의지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과는 대면하지 않았다. 조국 광복과 더불어 국민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1946년에는 의열단을 설치하였다. 송병선(宋秉璿), 최익현(崔益鉉), 민영환(閔泳煥), 이준(李雋) 등 4열사와 안중근(安重根),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등 4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리며, 매년 8월 15일 향화를 잊지 않았다. 그의 애국심은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때부터 써 온 것으로 보이는 수상록 <제천지>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전쟁 때 공산당에게 끌려가 1951년 5월 28일 구암리에서 학살당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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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 호는 성담(性潭). 한영식(韓永湜)이 지은 제문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