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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98년 3월에 부임하여 1798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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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 조선 전기 진안 출신의 의병. 호는 남은(南隱). 좌복야(左僕射) 함양군(咸陽君) 오광휘(吳光輝)의 후손으로 좌랑(佐郞) 오세득(吳世得)의 손자이며 순릉 참봉(順陵參奉) 오인수(吳麟壽)의 아들이다. 마령면 평지리에서 태어났다. 남다른 덕행과 효성, 학문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를 조직하여 곧바로 금산의 의병진에 이르렀으나, 당시 창평현(昌平縣)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먼저 고경명(高敬明)의 진영에 와 있던 사촌형 오빈의 만류로 귀가하였다. 오형은 벽계(碧溪)의 선영으로 돌아와 노모의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때마침 왜병(倭兵)이 쳐들어와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태연히 기운을 가다듬고 꾸짖으니 왜병도 의롭게 여기고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그 후 사위 신담(申湛)과 더불어 학문에 정진하며 지냈다.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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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1976현대 진안 출신의 종교인. 법명은 종태(宗泰), 법호는 형타원(亨陀院). 마령면 평지리에서 오종순(吳宗順)과 함께 쌍둥이로 태어났다. 마령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가정 형편이 어려워 3학년 때 자퇴하였다. 15세 때 전주로 가서 공장에서 일하던 중 1930년 원불교 교인인 최도화(崔道華)와 전삼삼(全參參)의 도움으로 1953년 오종순과 함께 출가하여 당리(當里)교무, 도양(道陽)교무, 수계(峀溪)교무, 중길(中吉)교무, 용암(龍岩)교무, 봉동교무, 장수교무를 지냈으며, 1956년 순교감(巡敎監), 1962년 감찰원 부원장, 1969년 영산선원장(靈山禪院長) 등을 역임하였고, 교육사업과 지역사회 발전에 공이 컸다. 원불교 초창기에 조전권(曺專權)·김영신(金永信) 등과 함께 교리를 통한 교세 확장에 기여하였다. 소태산(少太山)·정산(鼎山)·대산(大山) 등 3대에 걸친 종법사(宗法師)를 보필하여 대봉도 법훈을 받았다. 1976년 제11회 5·16민족상 사회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참고문헌》 『내고장 솜리』(이리시, 1989),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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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68년에 부임하여 1573년 임기만료로 체임된 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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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1758. 자는 문백(文伯), 호는 장암(莊菴). 진사를 지냈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영의정 충의공(忠毅公) 원성모(元成模)의 후손이며, 원릉군(原陵君) 원승길(元升吉)의 증손이다. 조득영(趙得永)이 행적을 기록하였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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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1636. 조선 중기 무신.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경범(景範), 초휘는 경심(景諶), 호는 송운(松耘). 원산군(原山君) 원황(元滉)의 후예로 이조판서 원계검(元繼儉)의 손자이고 참찬 원호영(元虎英)의 아들이다. 첫째 아들은 선전관 원승길(元升吉)이고 막내아들은 좌랑 원이길(元頤吉)이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해 선교랑 거산도 찰방[종6품 현감과 동급]과 현령을 지냈다. 청렴하고 결백하여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시흥[당시 안산]에서 만년을 보내는 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강화도를 점령한 청(淸)군은 시흥으로 진군해왔고 68세의 원성모는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모아 정왕산으로 올라가 봉수산성에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 청군의 기세가 만만찮아 의병을 이끌고 옥구도로 들어가 전투를 벌여 많은 적을 섬멸했다. 이후 그는 덕물도(德物島) 전투에서 적의 화공(火攻)에 밀려 두 아들과 함께 전장에서 순절했다. 가족들은 그가 유명을 달리하자 화살이 떨어진 배나루마을 산 중턱에 이들 삼부자의 시신을 묻었다. 묘는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배나루에 있었으나, 1990년경 본래의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선영으로 이장하였다(현재는 옥구공원에 있음). 이장할 때 원성모의 시신은 미이라로 발견되었다. 수염까지도 온전한 채로 속옷과 겉옷은 물론, 관복까지도 변색되지 않은 채 청군의 칼에 옆구리 두 곳을 맞아 흘린 혈흔이 관복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영조 때 순충장의 형난일등공신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시호로 충의(忠毅)를 내렸다. 함께 전사한 장남 승길은 후에 좌찬성 원릉군으로, 막내아들 이길은 호조좌랑으로 추증되었다. 판서 이광적이 지은 신도비명이 상전면 용평리 대구평에 있다. 진안과의 인연은 원성모의 큰 며느리 구씨가 병자호란을 피해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로 들어와 산 사실에서 비롯한다. 후에 진안의 유림이 원성모의 내력을 듣고 충절 3부자를 영모사에 배향했다. 《참고문헌》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진안향교지』(진안향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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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중기 의병. 자는 평중(平仲), 호는 남계(南溪). 증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낸 원계검(元繼儉)이고 조부는 승지를 지낸 원호영(元虎英)이고 아버지는 충의공(忠毅公) 원성모(元成模)이다. 성품이 근실하고 겸손하였으며, 이홍주(李弘冑)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일찍부터 문무를 익혔다. 1636년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원승길은 아버지와 동생 원이길(元頤吉)과 더불어 종실 영가군(永嘉君)과 협력하여 의병을 이끌고 분전했다. 형세가 불리하자 안산을 버리고 덕물도로 들어갔으나 청군의 화공(火攻)을 받아 세 부자가 순절하고 말았다. 부인 능성 구씨(綾城具氏)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부인은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쏟아지는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따라 죽기로 맹세하였으나, 아들 광옥(光玉)이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를 위에서 감싸고 통곡하니 적도 의롭게 여겨 함부로 하지 않았다 한다. 구씨는 남편의 장례를 마친 후 아들을 데리고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로 와서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이후 자손들이 진안과 장수 등지에 널리 퍼져 큰 성씨를 이루었다. 묘는 경기도 안산군 마유면 이진리[현 시흥시]에 아버지 원성모의 묘소 왼쪽에 있으나, 진안으로 내려온 구씨의 묘는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 설암산(雪巖山)에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자손들의 상소를 받은 조정에서 무과선전관훈련도정 이조참의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贈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좌찬성 원릉군(原陵君)으로 추증하였다. 원승길 신도비(←원승길 신도비문)가 상전면 용평리 대구평 마을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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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의병. 자는 운중(雲中), 호는 율은(栗隱). 원릉군(原陵君) 원승길(元升吉)의 후손이며 원일상(元壹常)의 아들이다. 1908년부터 1910년까지 3년 동안 인삼, 양곡, 지류(紙類) 등을 의병대에 공급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군 헌병대에 발각되어 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원도희(元道喜)가 찬한 묘표가 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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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포재(浦齋). 사림의 천거로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를 지냈으며 대덕산에 은거하였다. 김대유(金大有)가 지은 실기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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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72년 9월에 부임하여 1873년 1월 영평현령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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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93년 7월에 부임하여 1797년 7월 금산현령으로 전임. 호조좌랑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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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진안군수. 1963. 1. 1 부임하여 1963. 3. 24까지 3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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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진안 용담 출신의 효자. 자는 자익(子益), 호는 용강(龍岡). 사륙신 유응부(兪應孚)의 8대손이다. 7세에 『효경』에 정통하였다. 정려는 진안군 용담면 호미동에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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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1910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순국 지사.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1위. 자는 승수(承叟), 호는 회은(晦隱). 세자 시강원 부수(世子侍講院副率) 유진휘(柳進徽)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과정에 일화도 많이 남겼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안동의 옛집으로 돌아가 마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다음 곡기를 끊어 자결하였다. 단식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자지(自誌)’, ‘자명(自銘)’ 등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첫째 아들 유신영도 1919년 고종의 인산일에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1951년 안동의 유지들이 사회장을 지내고 화산(花山)에 이장하였으며, 대한이산묘에 배향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1(국가보훈처,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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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70년 5월에 부임하여 1671년 5월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