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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1871. 자는 우일(于一). 대호군(大護軍) 전극례(全克禮)의 후손이다. 고을사람들이 크게 기대하였으나 아깝게 요절하였다. 정종엽(鄭鍾燁)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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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97 진안읍 군상리에서 전혁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안초등학교, 진안중학교, 전주사범학교, 원광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교육학 석사이다.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진안교육청 장학사, 조림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진안의 얼』, 『진안지』, 『진안의 맥』, 『진안군사』, 『역사의 향기』, 『그리운 고향산천』 등 저서를 엮어냈다. 조림초등학교 교장 재임 중 1997년 10월 3일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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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호는 죽재(竹齋). 환성군(歡城君) 전섭(全攝)의 후예로 아버지는 현감 전만(全蔓)이다. 약관에 문명(文名)을 크게 떨쳐 김굉필(金宏弼)과 도의를 나누며 지내는 사이였다. 성종 때 문과에 뽑혀 내직과 외보를 두루 거쳤다. 옥과(玉果)현감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 이극돈(李克墩)이 성종의 국상에도 불구하고 국휼(國恤)하지 않고 매일 잔치를 즐기는 것을 보고 소인(小人)이라 직언하고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연산군 때 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에 나아갈 뜻을 잃고 집 뒤에 초당을 지어 ‘죽재(竹齋)’라 액을 달고 두문불출로 생을 마쳤다. 중종반정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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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대 진안군수. 1995. 1. 1 부임하여 1995. 6. 30까지 6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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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2~1538.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증조부는 결성 현감 정귀령(鄭龜齡), 부친은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이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르고 그 뒤 이조참판, 예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 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기민구제에 공헌하였다.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저서로는 『정문익공 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국역 국조인물고』(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2009), 김경수 「정광필(鄭光弼)의 생애와 현실 인식」(『대전문화』, 대전광역시, 2004), 최진홍 「정광필과 공」(『월간조선』, 조선뉴스프레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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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1911. 자는 윤실(允實). 정황(丁熿)의 후손이며, 지중추(知中樞) 정희남(丁熙南)의 아들이다.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정종엽(鄭鍾燁)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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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1934. 자는 문찬(文贊), 호는 회당(悔堂).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의 후손이며, 승훈랑(承訓郞) 정존도(鄭存道)의 손자이고, 통정(通政) 정성수(鄭成綏)의 아들이다. 고종조에 음사(蔭仕)하여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에 제수되었다. 아들 정관조(鄭觀朝)가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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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64년 7월에 부임하여 1864년 8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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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경홍(敬洪). 호는 운재(雲齋). 충간공(忠簡公) 정황(丁熿)의 후손이며, 감찰 정기석(丁基錫)의 아들이다. 동생 참봉 정현규(丁顯圭)와 함께 효성이 지극하였다. 김종한(金宗漢)이 찬하고, 윤영구(尹寧求)가 글씨를 쓴 쌍효비명(雙孝碑銘)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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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42년 6월에 부임하여 1845년 7월 원주로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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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98년 7월에 부임하여 1700년 5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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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1910. 전라북도 익산 출신. 한말의 문신, 순국지사.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경필(敬必). 1876년 무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친군별영초관 겸 선전관(親軍別營哨官兼宣傳官)에 임명된 뒤 충무위 좌랑(忠武衛左郞)으로 옮겨졌다. 그 뒤 훈련원 주부와 수주부(首主簿)로 승진하였다가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 첨정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통곡하며 포고문(布告文)과 토적문(討賊文), 자제들에게 주는 글과 종족들에게 주는 글을 써 놓고 완산부로 떠났다. 안찰사 이두황(李斗璜)에게 토역문(討逆文)을 제시하고 공북루(拱北樓)에 올라가 의관을 정제한 다음 목매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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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1657.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후기 의병. 자는 개부(蓋夫), 호는 모와(慕窩). 대사성 정곤(鄭坤)의 7세손이며 상호군(上護君) 정건(鄭健)의 아들이다. 외증조부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열심히 공부하여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숙부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規) 및 둘째 아들과 함께 가동(家童) 수 십 명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전응철(全應哲)·전응종(全應鍾)·신성식(辛成式)과 더불어 군량을 모아 여산(廬山) 모의소(募義所: 의병모집소)로 갔다. 다시 과천까지 행군하였는데 이미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 그 후 전라도 관찰사 이시방(李時昉)의 천거로 예빈시 정(禮賓寺正), 사복시 정(司僕寺正)이 제수되었으나 거절하였다. 사적이 『호남절의록』에 쓰여 있으며, 한기유(韓起愈)가 지은 행장(行狀)이 전해 오고 있다. 《참고문헌》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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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군수. 1948. 10. 26 부임하여 1948. 12. 24까지 2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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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 자는 의백(儀伯), 호는 하은(荷隱). 충렬공(忠烈公) 정인조(鄭仁祚)의 후손이다. 김태현(金泰鉉)에게 사사하였다. 이손(李巽)이 찬한 유허비문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