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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영산 신씨(靈山辛氏) 진안 마령면 입향조. 자는 계술(季述), 호는 서산정(西山亭). 고려 때 태학사를 지낸 문헌공(文憲公) 덕재(德齋) 신장(辛藏)의 후손으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신형(辛衡)의 아들이다. 선조 때 참봉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의 막하로 들어가 싸우다가 적이 쏜 탄환에 맞아 금산(錦山)에서 순절하였다고 한다. 이정붕(李廷鵬)이 지은 묘갈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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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진안군수. 1992. 7. 11 부임하여 1993. 5. 26까지 11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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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치수(1873~?)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문태서(文泰瑞) 의진에 가담하여 장수·용담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초에 문태서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었다. 김준대(金俊大), 고명주(高明柱), 고원중(高元仲), 안왈오(安曰五), 심우상(沈尤相), 원도숙(元道淑), 조경화(趙京化), 하준태(河俊太), 한청여(韓淸汝) 등 20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장수, 용담 등 부근 촌락에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9년 5월에 장수군 계북면 문성(文城) 동북쪽의 산중에서 함양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다가 선봉장 박춘실이 부상하여 체포되었고, 의병 13명이 전사하자 부대가 궤멸하는 참패를 당했다. 그 후 다시 호남의병단에 귀속하여 유격 활동을 하다가 1909년 9월에 검거되었다. 1909년 10월 8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1995년 대통령 표창에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자료집 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전북의병사』 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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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22년 9월에 부임하여 1725년 8월 대간에서 소를 올려 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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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69. 근현대 진안 출신의 효자. 자는 재민(才玟), 호는 미산(美山). 증조는 신종각(愼宗珏), 부친은 신달성(愼達晟)이다. 효행이 지극하여 부친의 병중에 온갖 탕약으로 구완하려 노력하였다. 부친이 죽자 예의를 다하여 장례를 치렀으며 3년 동안 시묘하였다. 부인도 함께 효성이 지극하였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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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93년에 부임하여 1599년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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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상의 인물. 신원충 또는 신언충이라는 전언도 있다.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천면 모정리 망덕에 신현충이라는 소년이 살았다. 마을 지주의 아들이었던 그는 학문보다는 무예를 좋아하였고 힘이 장사였다. 그는 활쏘기에도 빼어나 그의 누이가 동구 밖 우물에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오도록 하고 수백 보 떨어진 사랑채 마루에서 물동이를 쏘아 맞히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타고 다니던 용마와 활쏘기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즉 활을 쏘고 말을 달려 화살보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합이다. 정천면 망화리 자금마을에는 그가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활터가 남아 있다. 그는 평소 동네 젊은이들과 함께 병정놀이, 사냥놀이 등을 즐겨했는데 행동이 일사불란했고 기세도 대단했다. 그러자 인근은 물론 관아에까지 그 소문이 퍼지고 결국 한양까지 알려지게 되어 조정에서는 역모를 꾀하는 것이라고 짐작하여 군병으로 하여금 토벌에 나서게 했다. 관군이 출동하자 마을의 젊은이들은 이리저리 도망치다 결국 용담교(龍潭橋) 서쪽에 있는 층암절벽의 암굴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그러자 관군은 그의 어머니를 붙잡아 왔다. 그리고는 말의 꼬리에 어머니를 매달아 길거리로 끌고 다녔다.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산골을 울리자 견디다 못한 신현충은 그 자리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정의 징벌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역적은 조상의 산소 중에 명당이 있어서 태어났다는 생각에서 아예 그 소지를 없애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선산이 있던 망덕 뒷산과 갈두리·용평리 등의 묘, 그의 용마가 나왔다는 황산리의 용마혈 등을 파헤치고 숯불로 떴다. 또한 월평리 뒷산에 있는 ‘장군무도 족답월혈(將軍舞蹈足踏月穴)’을 파헤치려고 할 때 뇌성병력과 함께 소나기가 퍼부어 모두 놀라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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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83년 10월에 부임하여 1788년 5월 임기만료 체임.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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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낙광(1884~1910.11.06.) 이명 심낙선 (沈洛先)은 개항기 용담군 일동면 봉곡리(현 동향면 학선리) 출신 의병 이다. 1908년 2월 경남 안의군(安義郡, 현 함양군) 등지에서 문태수의진(文泰洙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8년 2월 15일 밤, 수 명의 의병과 함께 경남 안의군 황산면(黃山面) 김 모의 집에서 군자금으로 엽전 150냥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9년 6월 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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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95년 3월에 부임하여 1896년 7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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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대유(1884.12.08.~?)는 용담군 일동면 봉곡리(鳳谷里) 동향면 학선리 출신 개항기 의병. 1908년 문태서(文泰瑞)의 호남의병단에 가담하여 약 1년 6개월 동안 용담, 금산 등지를 잠행하면서 군자금을 모으고 유격 활동에 참가하다가 체포되었다. 1909년 6월 9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재판부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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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42년 10월에 부임하여 1746년 3월 신병으로 조병사가 장계하여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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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51년 3월에 부임하여 1755년 5월 동생이 역모에 걸리므로 연좌되어 종의 신분이 되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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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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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상(1887~?) 진안 용담군 이동면 대야리 출신, 1908년에 문태서(文泰瑞)의 호남의병단에 가입,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장수군 계북면 문성동 뒤의 덕유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면서 1909년 5월 김준대(金俊大)·고명주(高明柱)·고원중(高元仲)·신치수(辛致守)·안왈오(安曰五)·원도숙(元道淑)·조경화(趙京化)·하준태(河俊太)·한청여(韓淸汝) 등 20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장수·용담 등 부근 촌락에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태형(笞刑) 100도를 받는 고초를 당했다.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참고문헌》 『독립운동사 자료집 별집』1(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1974), 『전북의병사』(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