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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03.13.~1940.11.01. 일제강점기 진안의 학자. 자는 택신(宅新), 호는 수당(修堂). 정진희(鄭鎭喜), 정진용(鄭晉鏞)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증조부는 정수세(鄭需世), 조부는 정인민(鄭寅敏), 부친은 정성모(鄭聖謨)이다. 유학자로서 학문을 연마하며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항일의병 투쟁에도 적극 나서서 학행일치(學行一致)의 삶을 살았다. 성수면 좌포리에서 태어났고, 전우(田愚)와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힘써 연마하였다. 나라가 망하자 은둔의 삶을 살았다. 이후 이병연(李炳淵), 전인권(全麟權) 등과 함께 이석용(李錫庸)과 전기홍(全基泓) 등이 의병을 일으키는 데 협력하였다. 1911년 진안에서 이석용에게 군자금을 지원하였으며, 1912년 이석용이 의병 활동의 재개를 위해 조직한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에 가입하여 항일 의병투쟁에 참여하였다. 또한 이석용의 종군기록인 『창의일기』가 일본 경찰에게 빼앗길 우려가 있자 그 책을 자기 집에 보관하여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이석용이 일경에 붙잡히자 정종엽은 일경을 피하여 수시로 개명하고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어려운 삶을 살았다. 말년에는 마령면 계남리 선산 재각인 도장각(←道藏閣)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수당유고(修堂遺稿)』가 있다. 2011년 진안문화원에서 번역한 『국역 수당유고』가 출판되었다. 2003년 8월 15일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내산사(萊山祠)에 향사(享祀)되어 있다. 《참고문헌》 『수당유고(修堂遺稿)』, 『진안지』(진안향교, 1925), 『진안군 문화재 지표조사보고서』(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89), 『진안의 금석문』(진안문화원, 2001), 『전라북도 금석문 대계』2(전북역사문화학회, 2008), 『전북지방의 선정·공적·기념비』(한국문화원연합회 전북도지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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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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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진안군수. 1956. 12. 17 부임하여 1959. 1. 10 까지 2년 1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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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86년 6월에 부임하여 1688년 2월에 이임하였다. “인(仁)으로써 선정을 하고 백성을 구휼했다”고 『鎭安誌』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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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자는 재수(在樹), 호는 난파(蘭坡). 충렬공 정인조(鄭仁祚)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김대현(金大鉉)이 양대효행기의 서(序)를 짓고 김종한(金宗漢)이 찬하고 신현태(申鉉台)가 글씨를 쓴 효자비문이 있다. 《참고문헌》 『정태성 효자비(鄭泰成孝子碑)』,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지』(진안군지편찬 원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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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85년 4월에 부임하여 1785년 10월 고성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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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84년에 부임하여 1886년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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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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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1887.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무관. 자는 사유(士裕), 호는 운송(雲松). 처음 이름은 헌규(憲奎)였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던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의 11세손이다. 정천면 망화리에서 태어났다. 품성이 곧았으며 일을 처리하는 데는 언제나 공정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를 모시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1861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 부호군(行龍讓衛副護軍) 도총부 도총관(都總府都摠管) 겸 경복궁 오위장(景福宮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유림의 추천으로 판서(判書) 김종한(金宗漢)의 찬양문을 받았다. 《참고문헌》 『경주 정씨 이천년사』,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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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46년에 부임하여 1649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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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41년 1월에 부임하여 1842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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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9~1817.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학자. 초명은 성언(成彦). 조선 개국공신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의 15세손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의 9세손이다. 정천면 망화리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곧고 적극적이었으며 효행심이 두터웠다. 형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경주 정씨 이천년사』,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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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호는 양성헌(養性軒). 신라육부장(新羅六部長) 지백호(智伯虎)의 후예로 고려조 문하시랑(門下侍郞) 월성 부원군(月城府院君) 문성공(文成公) 정혼(鄭琿)의 아들이다. 천성이 효우(孝友)하였고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대호군(大護軍)에 올랐다. 뒤에 최영(崔瑩)의 막료가 되어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를 지냈다. 그 후 문하평리 겸 응양위상장군(門下評理兼應揚衛上將軍)으로 있다가 조선 개국의 공으로 순충분의 좌명개국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 판예조 겸 문하시중 첨의찬성 도평의사사 도총부도총관(大匡輔國崇祿大夫判禮曹兼門下侍中僉議贊成都評議司事都摠府都摠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올랐다.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양경(良景)’이고 특별시호는 ‘무열(武烈)’인데, 그 뜻은 “온량으로 덕을 좋아하였음을 良이라 하고 의로써 백성을 구휼한 공을 景이라 한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예장(禮葬)하록 하였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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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화(1861~?) 용담군 일동면 양지 출신,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문태서(文泰瑞) 호남의병단에 가입하여 전북 장수·진안·용담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조경화를 포함한 의병대들은 1906년 지리산으로 들어가 거의(擧義)한 후, 무주에서 의병 수십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여러 명을 사살하였다. 1906년 9월 하순에 장수를 점령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의병대에서 김준대(金俊大)·고명주(高明柱)·고원중(高元仲)·신치수(辛致守)·안왈오(安曰五)·심우상(沈尤相)·원도숙(元道淑)·하준태(河俊太)·한청여(韓淸汝) 등 20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장수·진안·용담 등 부근 촌락에서 군자금 및 군수 물자를 수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체포되어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태형(笞刑) 100도를 받는 고초를 당했다. 1995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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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65년 1월에 부임하여 1768년 6월 사헌부감찰이 되었다가 영천군수로 영전하였다. 관풍루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