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현감. 1842년 1월에 부임하여 1844년 6월 봉고파직 당했다.
  • 용담현령. 1825년 12월에 부임하여 1826년 3월 처의 병으로 사직하였다.
  • 진안현감. 1857년 7월에 부임하여 1857년 11월 수원판관으로 전임하였다.
  • 1827~1905. 한말의 문신, 순국열사.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치현(穉顯), 시호는 충정공(忠正公), 호는 산재(山齋). 현감 조유순(趙有淳)의 아들이다. 음관(蔭官)으로 참봉에 임명되었고, 1859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893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 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일제의 침략이 가속하여 세상이 어지럽자 가평에 은퇴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청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과의 면담이 좌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참정(參政) 심상훈(沈相薰),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 이근명 등과 함께 입궐하여 “을사늑약의 무효, 5적신의 처형, 새로 충량한 인재를 뽑아서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5조약을 파기할 것” 등을 연소(聯疏)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당하고 표훈원(表勳院)에 연금되었다. 곧 방면되었으나 다시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석고(席藁)하며 을사늑약의 파기를 주장하다가 또다시 일본 헌병에게 강제로 연행되었다. 특명으로 풀려난 뒤 비분을 참지 못하여 자결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용담현령. 1862년 4월에 부임하여 1863년 11월 경산현령과 맞바꾸어 전임하였다.
  • 1932~2003.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었던 진안농악 상쇠. 백운면 백암리 출생. 풍물을 하던 부친(1947년 전국대회에 참가한 장구의 조남주)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풍물을 익혔고, 좌도굿의 대가인 노문길, 한귀동, 김수동, 장두만, 김달마 등에게서 어려서부터 가락을 배웠다. 광복 후 교원양성소를 거쳐 초등학교 교사 재직 시 풍물을 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풍물에 전념하기 위해 수년간 계속했던 교직을 사직하고 전국 여러 곳의 학교를 전전하며 후진을 양성하다가 나이 들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진안에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후 지방무형문화재 뜬쇠가락 보유자로 지정받게 하였다. →진안농악 상쇠 조병호.
  • 진안현감. 1861년 7월에 부임하여 1864년 6월 고성으로 전임하였다.
  • 玄진안현감. 1826년 1월에 부임하여 1829년 12월 한산으로 전임하였다.
  • 1791~1859. 조선 후기 진안출신의 학자. 초명은 석규(錫奎), 자는 자관(子觀), 호는 국헌(菊軒). 충익공 조문택(曺文澤)의 후손으로 조상학(曺尙學)의 아들이다. 마령면 송내리에서 태어났으나 1819년 완주군 비봉면 월곡리로 이사하여 살았다. 기상이 비범하여 어려서부터 호학의 기질이 있어서 가전의 학문을 이어받고 경서 외에도 『주자대전』·『성리대전』·『근사록』·『율곡전서』 등도 깊이 탐구했다. 호남의 유림이 조석하를 관찰사 정범조(鄭範朝)에게 천거하여, 1854년 조정에서 학행으로 천거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저서는 8책이나 되었는데 화재로 유실되었고 그 뒤 여기저기 필사하여 모은 『국헌집(菊軒集)』3권 2책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국헌집』, 『완주군사』(완주군사편찬위원회, 1986),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진안현감. 1816년 6월에 부임하여 1818년 7월에 이임하였다.
  • 진안현감. 1834년 1월에 부임하여 1836년 2월 삼등으로 전임하였다.
  • 용담현령. 과거에 급제하여 1615년에 부임하여 1616년 파직되었다.
  • 용담현령. 1612년에 부임하여 1615년 온양현령으로 승진하였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 용담현령. 1719년 2월에 부임하여 1721년 10월 어사의 장계로 파직되었다.
  • 용담현령. 1897년에 부임하여 1899년 이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