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현감. 1630년 11월에 부임하여 1635년 12월에 이임하였다. “은혜와 위엄을 갖추었다”고 『鎭安誌』에 전한다.
  • 진안현감. 1778년 6월에 부임하여 1781년 6월에 이임하였다.
  • 용담현령. 1771년 6월에 부임하여 1775년 12 임기만료로 체임되었다. 금부도사였다가 본직으로 왔다.
  • 1836~1902. 개항기 진안 출신의 효자. 자는 덕인(德仁), 호는 원사재(源沙齋). 부친은 이우춘(李佑春)이고 이조(李晁)의 9대손이다. 아들로 도문(道文)·도화(道華)가 있다. 마령면 평지리에서 태어났다. 독서당을 짓고 ‘원사재(源沙齋)’라 하여 가난한 수재들을 가르쳤으며, 나중에 원사재는 마령초등학교가 개교할 때 학당으로 쓰였다. 또한 새집 짓는 동민에게는 며칠씩 무료로 봉사하고, 가난한 농사꾼의 농기구를 수선하여 주었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동네를 돌아다니며 기동(起動)을 재촉하여 근면 생활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효행과 덕행으로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에 등재되어 있다. 이도복(李道復)이 지은 ‘효자 이광범전(孝子李光範傳)’이 있다. 《참고문헌》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진안의 맥』(진안군, 1982),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홍재(弘宰), 호는 귀락당(歸樂堂). 문성공(文成公) 이명성(李明誠)의 후예로 도사(都事) 이현산(李賢山)의 아들이다. 1567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재은 참봉(齋隱參奉)이 되었다. 1570년 을사사화 때 화를 당했던 좌의정 유관(柳灌),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의 복권 노력이 있었는데 이광필 또한 연명 상소에 동의하면서 사림을 보호하려 노력하였다. 1583년에 함경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나가 1월부터 7월까지 여진족의 침입(「니탕개의 난」)을 평정했다. 이 공로로 온성부사(穩城府使) 신립, 부령부사(富寧府使) 김의현, 유원첨사(柔遠僉使) 이박 등과 함께 관서백(關西伯)에 제수되었다. 이후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1424.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초기 문신. 자는 흥서(興瑞), 호는 괴은(槐隱, 塊隱). 증조부는 대호군(大護軍) 이승안(李承顔), 조부는 상호군(上護軍) 이정공(李靖恭), 부친은 증좌의정(贈左議政) 이원발(李元發)이다. 아들로 이속(李續)을 두었다. 좌의정 이귀령(李貴齡)의 동생이다. 태조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1410년에 한성윤(漢城尹)으로 이른바 ‘천추절(千秋節)’ 사절로 명(明)에 다녀왔다. 1413년에 경성수보도감(京城修補都監) 제조(提調)가 되어 군조(軍調)를 수축(修築)하고, 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풍해에 ‘10만 양병(十萬養兵)’을 제안하는 등 새로운 법을 많이 창안하였다. 1414년에 경상도 도관찰사, 1415년에 개성부 유후(開城副留侯)에 이어 강원도 도관찰사 등, 벼슬이 형조와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만년에 용인 구수동으로 물러나 두 그루의 괴목(槐木)을 심어 스스로 괴은(槐隱)이라 하며 은둔하였다. 묘갈은 1831년에 다시 세워졌으며, 비문은 19세손 이의덕(李義悳)이 짓고 17세 방손 이병욱(李炳勗)이 썼다.《참고문헌》 『대한이산묘지』 (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진안현감. 1665년 10월에 부임하여 1666년 12월에 이임하였다.
  • 진안현감. 1747년 8월에 부임하여 1750년 3월 합천으로 전임하였다.
  • 진안현감. 1803년 11월에 부임하여 1805년 6월에 이임하였다.
  • 1881~1929. 일제강점기 진안에서 활동한 의병. 자는 원오(元五), 호는 오하(梧下). 부친은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이기영(李琪榮)이다. 1906년에 박이환(朴駬桓)과 문형모(文亨模)를 규합, 임병찬(林炳瓚)·최익현(崔益鉉)을 만나 의거에 동참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규홍은 가산을 방매하여 자금을 마련 총포와 화약을 구입하고 병졸은 전주감영의 병정 100여 명, 각처에서 자원해온 의병 100여 명, 포수(砲手)·지사(志士) 50여 명이 규합되었다. 1908년까지 진안, 장수, 용담, 고산, 진산, 금산 등지의 산간으로 옮겨 다니며 일본군과 싸워 일본군 2백여명을 살상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1914년 3월에는 임병찬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창립 계획에 참여하였다. 1917년 10월 대덕군 오도산성(五道山城)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탈출,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와 접촉, 김규식(金奎植)의 독립청원서 제출을 위한 파리(Paris)행 여비로 1,300원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에 협력하였다. 1920년 3월 만주로 옮겨 김좌진(金佐鎭)에게 군관학교 운영자금으로 3,000원을 헌납하였다. 그 해 6월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보부상으로 가장, 활약하였다. 1924년 2월 8일 서울에서 체포되어 4개월 동안 고문을 당하고 어깨가 절상되어 사경에 이르자 5월 28일 보석으로 출감되었다. 저술로는 『오하일기(梧下日記)』가 있다. 이는 1906년 초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활동한 때부터 의병을 해산하는 이듬해 4월까지 약 1년 4개월간에 걸친 기록이다.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고,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용담현령. 1876년 4월에 부임하여 1877년 6월 괴산현령으로 전임하였다.
  • 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1921. 10. 12 부임하여 1923. 3. 3 임실군수로 전임하였다.
  • 자는 용담(用耼), 호는 불류재(不流齋). 이대윤(李大胤)의 후손이다. 마령면 모사실[沙谷]에 살았다. 기정진(奇正鎭)과 송병선(宋秉璿)에게 수학하였다. “학행으로 이름났으며 쓴 글이 집안에 가득하였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향교, 1925)
  • 조선 중기 호조참판 홍습(洪濕)의 사비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전면 수동리 산정마을에도 왜군이 밀어닥쳤다. ‘충비열녀 이성난향지려(忠婢烈女李姓蘭香之閭)’에 의하면 “당시 마을에는 난을 피해 서울에서 내려왔던 참판 홍습(洪濕)이 있었는데,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재 너머 깊은 산중까지 피신하였지만 서두르는 바람에 식량을 준비하지 못해 끼니를 걱정할 처지였다. 주인 가족의 어려움을 보다 못한 난향이 식량을 구하려고 야음을 틈타 마을에 내려왔으나 홍습의 집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어디서도 쌀 한 톨 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갑자기 마을을 순찰하던 왜군들에게 붙잡혔다. 난향은 왜군들에게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했으나 끝내 주인이 있는 곳을 고하지 않았고 욕을 당하기 전에 혀를 깨물어 자결하였다.”고 한다. 1604년에 명정(命旌)을 내렸다.《참고문헌》 『진안의 금석문』(진안문화원, 2001)
  • 진안현감. 1857년 12월에 부임하여 1858년 8월 재령군수와 자리를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