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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22년 4월에 부임하여 1822년 7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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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봉(1891~1910.11.07.)은 용담군 일동면 봉곡리 출신이다.
문태수의진에 참여하여 1909년 2~3월경 전북 금산군 어재리(於在里), 같은 해 음력 3월 4일 용담군 일동면(一東面) 봉곡리(鳳谷里), 3월 12일 금산군 수통동(水通洞)에서 군자금과 군수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9년 6월 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전북의병사』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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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40년 8월에 부임하여 1745년 7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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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00년 8월에 부임하여 1803년 10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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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1924. 12. 24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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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1916. 조선 후기 진안의 학자. 자는 하경(夏卿), 호는 만오(晩塢). 조석희(曺錫羲)의 아들이다. 진안군에서 태어났으나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마음씨가 단정하고 성품이 인자하였다. 1886년에 크게 흉년이 들자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했다.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 『만오유고(晩塢遺稿)』1책[인쇄본]이 전하고 있는데 이를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에 조호열이 소장하고 있다. 《참고문헌》 『만오유고』(조형승), 『완주군사(완주군사편찬위원회, 1986),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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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66년 1월에 부임하여 1867년 10월 대구판관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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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기록이 멸실되어 구체적 재임연대는 미상이나 192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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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4~1260. 고려 후기 남송에서 귀화하여 진안에 은거한 학자. 본관은 중국 신안(新安), 호는 청계(淸溪). 증조는 주희(朱熹)이고 조부는 주야(朱埜), 부친은 주거(朱鋸)이다. 아들은 주여경(朱餘慶)이고 손자는 주열(朱悅)이다. 중국 하남성 낙양시 신안현에서 태어났다. 남송의 과거에 급제한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와 태학사(太學士)를 거쳐 관직이 비서각직학사(秘書閣直學士)에 이르렀다. 그 후 점차 국운이 쇠하던 남송이 원(元)의 침공으로 멸망하자 1212년 가족과 문인들인 도성하(陶成河)·두행수(杜行秀)·섭공제(葉公濟)·유응규(劉應奎)·조창(趙昶)·주세현(周世顯)·진조순(陳祖舜) 등 7명의 학사(學士)들을 이끌고 고려로 피신하였다. 처음에는 전라도 금성[錦城 : 현 나주시]에 거주하였다가, 얼마 뒤 원의 세조가 고려로 피신한 송의 구신(舊臣)들을 압송하려 하자 다시 전라도 능성[綾城 : 현 화순군]으로 옮기면서 이름을 적덕(積德)으로 바꾸었다. 이후 다시 무주 무풍면(茂豊面)을 거쳐 진안군 주천면 신안촌(新安村)에 은거하다가 1260년 사망하였다. 주천면 주양리의 주천서원(朱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세창서관, 197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전북향교원우대관』(전라북도향교재단,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