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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초기 문신. 자는 기원(基遠), 호는 유계(幽溪). 직제학(直提學) 이교(李校)의 증손(曾孫)이고 참봉(參奉) 이계남(李繼南)의 아들이다. 『대한이산묘지』에 의하면 “타고난 용모와 성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고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의 병환을 직접 간호하며 여러 차례 감응을 얻었다” 한다. 김굉필(金宏弼)과 알고 지냈다. 성종 때 효행·문장(文章)·덕업(德業)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안악군수(安岳郡守)에 이르렀다. 1498년의 무오사화 때 상소하여 사림(士林)을 구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산군의 방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말리는 상소를 올린 일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붙잡혀 갇혔는데 사헌부에서 구원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두문불출하며 지내다 세상을 마쳤다. 충정공(忠貞公) 이상진(李尙眞)이 지은 묘갈(墓碣)이 전해진다. 《참고문헌》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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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01년 10월에 부임하여 1704년 1월 의원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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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1949. 일제강점기의 유학자·관원. 일찍이 궁내부(宮內府) 판임관(判任官)을 지냈다. 호는 수당(守堂)·추운(鄒雲).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의 11대손이고 증 사헌부지평 이홍(李泓)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증 동몽교관 이희식(李希植)이다. 서울에서 태어났다. 송병선(宋秉璿)·송시열(宋時烈)의 학풍을 이어 받았으며 전우(田愚)와도 교유하였다. 1910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낙향하여 주천면 대불리 개화동에 화양도원[대불초등학교(폐교)의 전신]을 열고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1919년 고종 승하를 맞아 화양산에서 제사지낸 이후, 1922년 순종이 ‘삼극사(三極使)’로 임명하자 화양산 정상과 전국 6개소에 ‘황단(皇壇)’을 설치하여 국태민안과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삼극제를 매년 음력 8월 29일 정오에 지냈다. 삼극이란 ‘천극(天極), 지극(地極), 인극(木極)’으로서 각각 ‘옥황상제, 공자, 고종’ 등 3위(位)를 말한다. 1922년에는 유림건약(儒林建約) 십삼도(十三道) 도강원(都講院)으로부터 13도(道) 도순강장(都巡講長)에 임명되어 전국을 순방하면서 학문에 전념하는 인재를 구하여 전통적인 유교정신과 배일사상을 기르고, 삼부강의문(三府講義文)을 통하여 우국충정을 역설하였다. 체계적인 저서는 남기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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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1951. 일제강점기 진안 출신의 학자. 자는 여일(汝日), 호는 산남(山南)이다. 고려 정당문학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의 후손으로 증조는 이규열(李奎烈)이고 조부는 이우만(李佑萬)이며 이공범(李貢範)의 아들이다. 아들은 이길수(李吉洙)이다. 『진안지』와 『진안군지』에 의하면 “최익현과 송병선, 전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도복(李道復)에게서도 수학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경학(經學)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스승으로 삼아 ‘산남선생’이라 불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령면 평지리 사곡(沙谷)에 세워진 비석에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내용의 ‘산남애친가(山南愛親歌)’가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이도계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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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1930.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자는 선일(善日), 호는 소능(小能). 이조(李晁)의 10대손이며 경무공(景武公) 이제(李濟)의 후손으로 부친은 이광범(李光範)이다. 마령면 평지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지극하게 섬겼다. 글을 좋아하여 최흠재와 교유하면서 학문을 논하고 남의 집 비문 등 금석문을 많이 써 남겼다. 또한 동생 이도화(李道華)와는 우애가 돈독하여 땅을 사면 동생에게도 나누어 주었고 조카들을 공부시키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마령면에서는 ‘우애 깊은 아무개’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삼강록』에 실려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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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1938. 개항기 진안에서 은거하며 활동한 학자. 자는 양래(陽來), 호는 후산(厚山). 고려 정당문학(高麗政堂文學)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의 후예로 부친은 이동범(李東範)이다. 아들로는 이면수(李冕洙), 이곤수(李袞洙), 이필수(李鞸洙) 등이 있다. 단성현(丹城縣)[현 함양군] 신안동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곧고 재주가 비범하여 사우들의 추종을 받았다. 1882년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1888년 최익현(崔益鉉)에게 사사하였으며, 한유(韓愉)·정재규(鄭載圭)·전우(田愚) 등과 교류하였다. 1905년에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을사늑약 무효화와 을사오적 처형’을 상소했다. 그 해 5월 송심석(宋心石)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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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949. 자는 화일(華日), 호는 미능(未能). 흥안군(興安君) 경무공(景武公) 이제(李濟)의 후손이다. 이광범(李光範)의 아들이나 출계하여 이상범(李尙範)의 뒤를 이었다. 생가의 친형 이도문(李道文)과는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합심하여 조상 섬기는 일에 전력하였고, ‘채헌유고(債軒遺稿)’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정귀영이 묘표를 찬하였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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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55년 6월에 부임하여 1856년 7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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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1919. 자는 진화(振華), 호는 가석(可石). 이명성(李明誠)의 후손이며 성균진사(成均進士) 이호년(李浩秊)의 아들이다. 정종엽(←鄭鍾燁)과 어려서부터 사이좋게 지냈다. 안병태(安秉台)가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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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1919. 10. 8 순창군수에서 진안으로 전임, 1921. 10. 12 임실군수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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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1910. 경상북도 예안(현 안동시) 출신. 한말의 학자.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1866년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고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여러 벼슬을 역임하는 동안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박한 상소를 올렸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유서를 써놓고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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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후기 무신. 자는 직향(直鄕), 호는 근재(謹齋). 이달손(李達孫)의 6세손이며, 아버지는 이유항(李惟恒)이다. 재기가 웅대하고 사예(射藝)에 능하여 무과에 합격하고, 선전관을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이상진(李尙眞)의 천거로 곡성현감을 제수받았다. 뒤에 고원군수와 하동군수를 지내던 중 오두인(吳斗寅), 이세화(李世華), 박태보(朴泰輔) 등과 함께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려,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되었다. 1694년에 복관되고 1698년에 다시 삭주 도호부사가 제수되었다. 《참고문헌》 『전북원우록』,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2009),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http://people.aks.ac.kr/), 한국 민족 문화 백과사전(http://www.ency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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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58년 1월에 부임하여1861년 6월 대흥현령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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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90년 9월에 부임하여 1793년 6월 강진현령으로 전임하였다. 호조좌랑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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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08년에 부임하여 1611년 병으로 교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