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현감. 1557년 3월에 부임하여 1559년 6월에 이임하였다.
  • 1852∼?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용담군 이동면(동향면) 대량리 보촌 출신이다. 문태수(←文泰洙) 의진에 가담하여 진안지역에서 활동하며 화약제조, 총기수리 등 주로 의병부대의 화력 지원 활동을 하였다. 1909년 6월 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9(국가 보훈처, 1991), 『전북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용담현령. 1584년에 부임하여 1587년 파직되었다.
  • 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1880~1913. 한말의 의병장. 경상남도 안의(함양군) 출신. 본명은 태현(泰鉉), 별명은 태서(泰瑞), ‘태수’는 의병장 시절의 이름이다.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1907년 하사에 이르렀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된 후 ‘대한관동 창의장 이인영(李麟榮)’이 의병활동을 촉구하는 격문을 뿌리자 각도 대표들과 출진, 호남창의대장에 임명되어 13도 연합의병부대의 일진이 되었다. 그러나 이인영의 부친상으로 서울 진격계획이 취소되자 의병을 이끌고 무주로 복귀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1908년 무주·장수·용담·남원·청산·금산·영동·옥천·상주·청주·보은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 군경에 타격을 주는 전투를 벌였다. 11월, 일본 경찰의 밀정과 격투 끝에 부상을 입고 붙잡혀 대구감옥에서 숨졌다. 일설에는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에서 사형 당하였다고도 한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 근대 진안 출신의 효자·자선가.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지강(芝岡). 용담면 옥거리에서 태어났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이웃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돈과 곡식을 나누어 주어 구휼하였다. 1895년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많은 사람들을 모집하여 동학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군사들에게 군량을 대어주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전라문화의 맥과 전북 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 ?~1908. 서울 출신. 한말의 의병장.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1897년 대한제국군 원주 진위대 고성 분견대의 정교(正校)를 지내고, 뒤에 춘천 분견대에 전입, 1901년 특무정교가 되고 원주 진위대에 전입되었다. 1907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군을 해산하려 하자 3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 경찰을 습격, 3시간 동안 격전하였다. 그 뒤 의병 부대를 소단위의 부대로 편성하고, 제천·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08년 2월 29일 일본군과 접전 중 사로잡혀 탈출하던 중 사살 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용담현령. 1578년에 부임하여 1580년 파직되었다.
  • 1861~1905. 서울 출신.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문약(文若), 시호는 충정공(忠正公), 호는 계정(桂庭). 호조판서 민겸호(閔謙鎬)의 아들이다. 1877년 동몽교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正字), 검열, 설서(設書), 수찬(修撰), 검상(檢詳), 사인(舍人) 등을 역임하다가 임오군란의 발발로 아버지 민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884년 이조참의에 임명된 뒤 도승지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자 국운이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시킬 것을 결심하고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동상은 안국동 로터리에서 와룡동 창덕궁 앞으로 옮겨졌다. 유고 중 대표적인 것으로 『해천추범(海天秋帆)』, 『사구속초(使歐續草)』, 『천일책(千一策)』 등이 있고, 그밖에 많은 소(疏), 차(箚) 등이 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1552~1626. 조선 중기 진안현감을 지낸 문신. 자는 백춘(伯春), 호는 태천(苔泉). 시호는 경정(景靖). 증조는 첨정(僉正) 민규(閔珪), 조부는 장원(掌苑) 민종윤(閔宗胤), 부친은 부정(副正) 민사권(閔思權)이다. 민성(閔垶)·민청(閔埍) 두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1573년 사마시에 진사로 합격한 후 진안현감으로 1578년에 부임하여 1579년 2월에 이임하였다. 1584년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 한 때 사헌부 감찰을 지낼 때 서인(西人)이라는 이유로 안협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때 기근이 들었으나 백성을 잘 무휼하고 진안현감으로 전임되었다. 진안 현감으로 재임 중 기축옥사가 발발하였다. 그때 정여립(鄭汝立)이 진안현의 경계로 들어오자 군사를 동원하여 정여립을 자결하게 하고 그 아들 정옥남(鄭玉男)을 잡아 들였다. 그 공으로 예조참의로 승진되고 평란공신(平亂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장례원 판결사, 충주목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황주목사로 임진강을 지켰으며 왕의 피난에 수행하였다. 성절사(聖節使)로 명(明)에 다녀왔다. 천장 문안관(天將問安官), 청주목사 등을 거쳐 1598년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다. 1604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에 다녀온 뒤 안변부사, 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1621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태천집(苔泉集)』이 있다. 묘는 김포시 월곶면 비아산(比兒山) 선대 묘역의 해좌(亥坐)인 언덕에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우암집(尤菴集)』, 『국역 국조인물고』(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1999),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