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삼의당
  • 용담현령. 1829년 10월에 부임하여 1830년 8월 순안현령으로 이임하였다.
  • 자는 사묵(士黙), 호는 겸재(謙齋). 수직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절효공(節孝公) 서릉(徐稜)의 후손이며, 사복시정(司僕寺正) 서국빈(徐國賓)의 아들이다. 서정표(徐廷杓)가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1917. 9. 10 부임하여 1919. 10. 8 옥구군수로 전임하였다.
  • 용담군수. 1900년 이후 부임하였으나 부임연대와 이임연대는 미상이다.
  • ?~1908.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일명 서병훈(徐丙勳). 호는 고암(孤岩).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진안에서 ‘진안동맹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항일 대열의 길에 들어섰다. 이석용(李錫庸) 의진(義陣)에 합류한 후 진안읍을 습격하여 일본군을 패주시키고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기도 하였다. 1908년 3월에는 운현(雲峴)에서 일본군과 일대 격전을 벌였으나 박운서(朴雲瑞) 등 16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2년 임실군 성수면 소충사에 배향되었으며, 2005년에는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1008-5번지 ‘운현전적지 추모공원’ 내에 ‘운현전적 의혼추모비(雲峴戰績義魂追慕碑)’가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진안지』(진안 향교, 1924),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전북의병사』(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2),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 용담현령. 1802년 9월에 부임하여 1806년 6월 대흥현령으로 영전하였다.
  • 용담현령. 영춘현감이었다가 1758년 5월에 용담현령으로 부임하였으나, 전임지의 환곡사건으로 잡혀갔다.
  • 용담현령. 1580년에 부임하여 1583년 병으로 물러남.
  • 진안현감. 1761년 10월에 부임하여 1762년 6월에 이임하였다.
  • 진안현감. 1865년 9월에 부임하여 1865년 12월 봉고파직되었다.
  • 진안현감 겸직이었다. 1654년 2월에 부임하여 1655년 1월에 이임하였다. 1655년 1월에 진안현을 다시 열었다.
  • 진안현감. 1875년 4월에 부임하여 1875년 12월 가평군수로 전임하였다.
  • 1869~1940. 한말의 학자, 의사(義士).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초명은 진삼(鎭三),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 또는 율재(栗齋).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고광선(高光善)·박인섭(朴寅燮) 등과 교유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기우만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장성과 나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웠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아미산(峨嵋山) 남쪽 기슭에 남파서실(南坡書室)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심혈을 경주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1940년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며 맹세코 성을 고치지 않겠다는 ‘절명시(絶命詩)’ 2절과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저서로 『남파유고』가 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성문오(1881~?) 한말의 의병 용담군 이동면 내유곡리 출신. 1908년 초 문태수가 지휘하는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덕유산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유격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909년 9월 동료의병 20명과 함께 검거되어 10월 8일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2013년 대통령표창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공훈록